부산상회(釜山商會)-재즈
방영훈 미공개 소설 연재(48)
<<부산상회(釜山商會)-재즈>>
그러나 이번에는 각목을 휘둘러대는 소리대신 물 내리는 소리가 ‘쏴~’하니 들려왔다. 또 한 10분이 흘렀다. 그러다 이번에는 책상내리 치는 소리와 뺨 때리는 소리 등이 동시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갑자기 보길이 흐느끼는 소리와 악쓰는 소리가 유치장 철창을 흔들었다. 상수는 더 들을 수가 없어 머리를 양 다리 사이에 묻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갑자기 정적이 흘렀다. 더 이상 보길의 악다구니도 그리고 고문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상수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상수 역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식사가 들어왔다. 꽁보리밥에 단무지 몇 개가 전부다. 입안이 여간 깔깔하지 않다. 사람들은 말없이 나무도시락에 든 밥을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비웠다. 그렇게 3일이 흘러갔다. 그를 데려간 사복경찰관중 아무도 상수를 부르지 않았고 또 그를 고문실로 데려가지도 않았다. 함께 수감되어 있는 사람 중 몇 사람이 유치장으로 끌려간다며 나갔다.
‘보길은 어떻게 됐을까? 도대체 그들은 숙소를 어떻게 알고 덮쳤을까?“ 이런저런 궁리와 생각들로 상수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형을 따라나서는 게 어니였었어” 그렇다고 보길을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대로 맞아죽는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돈 때문에 보길을 따라나선 것도 아니었다. 처음엔 ‘서울구경 시켜주겠다’는 말에 끌렸다. 그리고 ‘동네주먹질 할 게 아니라 전국주먹이 한번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더 매력적이었다. 상경한 날 밤, 보길과 그의 친구들이 ‘남아라면 정의를 위해 주먹을 써야한다’는 말에 피가 끓었고 경찰관들과 맨주먹으로 싸우는 노조원들이 측은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독립 운동하는 사람도 아닌 터에 경찰서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다면 우스운 모양이라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는 것이었다.
4일째 되는 날 아침, 모기에게 물린 자국을 긁느라 장딴지를 벅벅 긁고 있는데 간수가 그를 데려나갔다.
“이상수” “녯” “22세 맞나” “옙”
“고향이 부산 자성대,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지?” “예”
순간 상수의 눈에 눈물이 어리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효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주먹질이나 하고 돌아다녀서야 되겠나 이 사람아” 처음 그에게 오랏줄을 맨 경찰관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결 눈매가 예리한 데 비해 진중하게 보였고 이상하리만치 믿음이 가는 모습의 사복경관이었다. 그리고 그들보다는 훨씬 상관인 듯 한 인상을 준다.
“또 이런 데 나와 주먹질 할텐가?” 그제서야 상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와 상수는 조그만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고 책상 위에는 조그만 등 하나가 매달려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방 한 구석에 각목 여러 개가 질서정연하게 쌓여있었고 밧줄을 매달 수 있는 봉 하나가 벽과 벽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큰 물통하나가 물이 가득 담긴 채 덩그러히 놓여 있었다.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했다는 곳이 고작 이 정도란 말인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슬며시 배어 나온다. 그 때 사복형사가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놓았다. “자 이것 읽어보고 자필 서명하게”
<재즈>
100평 남짓한 홀이 입추의 여지없이 꽉 들어찼다. 10월 첫 주 금요일 저녁. 미군클럽 공식 오픈데이였다. 병사들은 군복에 점퍼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클럽으로 몰려왔다. 이들은 짚프나 트럭에 실려 한꺼번에 몰려와 저녁 7시가 되자마자 전 좌석을 가득 메웠다.
클럽 이름은 ‘캘리포니아’ 입구에 <조선인 출입금지>라는 팻말도 섰다. 홀 끝 무대에는 석기현이 이끄는 ‘캘리포니아 악단’이 대기하고 있었고 한국인 아가씨 10여명이 한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빠텐은 흑인하사 윌리엄이, 보조빠텐에 권두하가 나비넥타이를 매고 손님을 기다렸다.
권두하는 꼬박 3개월을 그에게 칵테일 만드는 법을 배웠을 뿐아니라 일상 영어도 익혔다. 그런데 술병의 이름은 보고 읽는 게 아니라 그냥 달달 외워 익혔다. 칵테일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한 가지씩 제조법을 배울 때마다 나름으로 일일이 종이에 적어가며 익혔던 것이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좋은 맛을 낸다고 ‘원더풀’을 몇 번이나 외쳤다. 제대가 6개월밖에 남지않은 그는 군 입대전 고향인 캘리포니아에서 빠텐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악단명도 그가 제안했다. 글/ 방영훈(중앙대학교 졸, 전 한국일보 기자, 현 동두천영상단지추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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