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조롱한 고독한 시인 김시습
조선의 괴짜 선비들(2)
세상을 조롱한 고독한 시인 김시습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타고난 천재성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기인이었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자평했다. “모습은 지극히 못생겼고 말 또한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으로 버릴지어다” 자신의 인생을 예언한 말 같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글이라 볼 수 있다.
김시습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집에서 공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 그 다음날 김시습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경호 최치윤이 논어에 나오는 말을 따서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時習)이라고 지워 줬고, 그의 부모는 그대로 따라 시습(時習)이 됐다. 그는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살 때에는 이미 시를 지었을 뿐아니라 소학 등을 읽고 그 뜻을 깨달았다. 그는 말 그대로 천재였다.
김시습은 세종 때 발탁되었다. 그러나 그 후 정치적 흐름은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禪位)하게 되었다. 이에 통분을 금치 못한 김시습은 꼬박 사흘 동안 망연자실하여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책을 모아 모두 태워버렸고,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고는,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스물 하나였다. 그는 아무런 계획 없이 방랑길에 올랐다. 그의 유명세로 어디가든 융숭한 대접을 받았지만 가슴 한구석에 한 맺힌 젊은 지식인의 회한은 지울 수 가 없었다. 전국을 유랑하며 자신의 울적한 심경을 시 짓기로 달래며 이런 저런 별호를 얻었다. ‘시습’ ‘열경’ ‘설잠’ ‘동봉’ ‘청한자’ ‘벽산’ ‘청은’ ‘췌세웅’ ‘매월당’이다.
세조가 즉위한 후 복벽(물러난 임금을 다시 임금 자리에 앉히는 것)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는 육시처참 됐고 김시습은 정처 없는 유랑생활은 계속됐다.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 세조에게 김시습을 적극 추천, 세조의 불경번역작업에 참여 했다. 그러나 계유정란 공신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져 김시습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으로 들어가 침거했다.
김시습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다. 끊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고 책을 읽다가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했다. 그는 시를 지어서는 마구 찢어서 던져 버리는 등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했고 그는 혼 나간 사람처럼 살아갔다.
얼마 후 효령대군과 세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금오산으로 들어가 속세와 단념하고 6년간 머무르면서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 <산가백영>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세조와 예종이 연이어 죽고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47세 때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으며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듯 했으나 성종 13년(1482년) 폐비윤씨(연산군의 생모)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을 본 김시습은 또 다시 세상만사의 허무하고 혐오스러워 다시 방랑길을 떠났다.
광음이 번듯하기가 우렛소리와 같고
세월이 나와 함께 날려볼까 하였으나
필경엔 헛된 데로 돌아가고 말았도다
내 몸이 내 것이냐 내 것이 아니러니
하루아침에 다시 이름은 없어지네
세상영화 허무하니 어찌 족히 믿을쏘냐
하늘과 땅이 모두 쑥대로 된 집이로세
저궁도에 든 사람을 세상이 비웃으니
울고 울고 또 울다가 끝마침이 어떠하오
천재로 태어나 10대 학문에 몰두 했고, 20대 세상을 한탄하며 방랑생활을 시작했고 40대 잠깐 세상에 돌아와 현실을 비판하며 사색과 수도에 정진하다, 59세에 속박의 허울을 벗고 자연으로 돌아간 김시습은 너무나 고독한 기인이었다.
글/ 김영진(칼럼니스트, 작가)
세상을 조롱한 고독한 시인 김시습
김시습은 수락산 중턱 장재울(옛 양주, 현 노원구)에 수락정사를 짓고 10여년을 생활했다. 사진은 수락산 둘레길에 소개된 김시습의 시 ‘수락산의 남은 노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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