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평화주의와 우리의 평화운동(2)
(전호에서 계속)
함석헌에게서 평화는 가능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왜 살아야 하냐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과 같다. 어느 누구도 살 가치가 있다거나, 살아야 할 어떤 당위성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낳았으니까 사는 것이요, 살려 주시는 것이니까 사는 것이지, 어떤 자유의지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닌 것과 같다. 물론 살지 않고 죽음을 택할 수는 있는 것이지만, 그 순간 삶과는 일단 떨어진다. 살아 있는 한은 살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생각할 것 없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다른 질문이 없다.
이것처럼 평화롭게 사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삶이 아니면 죽음이듯이, 평화가 아니면 반(反)평화나 불화가 있을 뿐이다. 즉 평화롭게 살아야 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평화가 필요한 것이냐, 가능하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느냐를 뛰어 넘는 문제로 설정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를 따지는 말의 전개가 필요가 없다. 평화하지 않으면 죽음이다 하는 것에 걸리는 문제기 때문이다.
화는 곧 조화ㆍ고름인데, 고르게 되지 않고는 세계가 서갈 수 없다. 안ㆍ밖ㆍ생ㆍ무생을 말할 것 없이 복잡한 힘의 얽힘이다. 그 얽혀 작용하는 것이 어느 고른 상태에 이르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코스모스라는 말은 그래서 있다. 하나의 질서 잡히고 법칙 있는 세계가 된 다음에야 우리가 능히 생각하고 알고 교섭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는 설혹 상상한대도 혼돈ㆍ어지러움ㆍ허무ㆍ두루뭉수리밖에 없다. 우리가 있을 때, 알 때, 나일 때는 벌써 거기 세계 곧 질서ㆍ코스모스ㆍ대조화ㆍ평화가 있었다. ‘화(和)는 천하지달도(天下之達道)다.’(중용) 그러므로 화는 알파와 오메가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는 구경의 원리인 동시에 또 내재의 원리다. 칸트가 위와 안을 보고 다 같이 놀라고 찬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중간의 세계도 알고 보면 놀랍다. 공자가 교육의 대강을 말하는데, 명명덕 친(신)민 지어지선(明明德 親(新)民 止於至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말할 때 첫머리에 평천하(平天下)를 내걸었다. 명명덕 어천하(明明德 於天下)라 했다. 예수가 날 때 하늘에서 찬송이 들려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기쁨’이라 했다. 노자의 무위(無爲), 석가의 니르바나도 요컨대 평(平)의 자리다. 예와 이제를 말할 것 없이, 종교 정치를 가를 것 없이, 사람인 다음에는 다 평화를 내세웠다.
전쟁을 직업으로 하여 불쌍한 씨?의 피로 제 살을 찌우고 기름을 짜며 사람 죽임을 재미있는 장난으로까지 하는 소위 영웅이란 것들도 입으로는 평화를 위해 하노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내놓고 전쟁을 예찬하는 놈은 미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악마의 종자라고 할밖에 없다. 씨?은 말하자면 내재의 평화, 극소세계의 평화다. 본질적인 평화다. 씨?의 바탈이 평화요, 평화의 열매가 씨?이다. 그러므로 씨?의 목적은 평화의 세계 이외에 있을 수 없다. 극소는 극대에 통한다.”
결국 그에게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 그것들이 교섭하여 사는 방법은 화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내세우는 평화사상의 알파요 오메가다. 그런데 이것들이 깨지는 데는 몇 가지 사회제도와 그것에 힘을 업은 인간의 집단 심리와 집단행동에서 연유한다. 소유제와 국가지상주의와 계급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국가지상주의다. 국가주의는 결국엔 국가지상주의, 민족 지상주의로 변하여 나와 다른 민족이나 나와 다른 가문, 또는 내나라 다른 나라, 나와 다른 종교에 대한 전쟁을 때때로 신성한 것으로 만들었다. 대개 정의로운 전쟁이나 거룩한 전쟁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뒷받침하는 철학은 차별에 있다. 나와 너는 다르다는 것, 다른 너는 나의 소유물이나 밥이나 도구가 되어도 좋다는 기본철학을 깔고 있다. 여기에 모든 중심은 ‘나’에 있다. ‘우리’나 ‘서로’가 아니라, ‘나’를 중심에 놓는다. 이 때 나는 언제나 강력하여야 했다.
여기에 복무한 것이 이른바 우승열패, 약육강식 따위의 사회진화론적 차원의 관계철학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화쟁의 원칙이 없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다른 이론, 즉 생물진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들은 꼭 강자만이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약한 자들이 연합하여 살아남았다는 이론이 매우 강하다. 이것은 러시아의 학자 크로포트킨이 쓴 『상호부조론』에서 주장하는 화쟁과 상생의 논리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상생관계로 돕고, 어떤 것은 상극관계로 돕는다. 그것들은 서로 함께 존재해야 살아나가는 것이지, 어느 것이 사라지면 다른 것 역시 사라진다.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 역시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원리다. 원칙이 그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글/김조년 교수(한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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