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김정택 연출의 외길 인생
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연극인 김정택 연출의 외길 인생
연극인 김정택 연출의 외길 인생
지난 11월 15일 정오 무렵 극단 창조극장 김정택(사진) 대표가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리고 ‘고통도 눈물도 없는 그곳’으로 떠났다. 지병인 만성 신부전으로 신장투석 18년의 긴 투병생활 끝에 안식을 얻은 것이다. 100세 시대라는 요즘 세상에 소천이 너무 빨라 공허한 마음에서 부질없이 그의 외길 연극인생을 더듬어보게 된다.
그는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졸업 후 1981년 신촌역 앞에 극단 전용 서라벌소극장을 개관하여 첫 무대로 <겨울사자들>을 선보여 연극계의 관심을 끌었다. 그 당시만 해도 연극 전용극장이 손꼽을 정도로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 얼마 못가서 우리네 열악한 연극 환경을 그대로 보여주듯 극장은 문을 닫았는데,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 모른다. 어느 글에서 밝힌 김대표의 그때 심정을 생생하게 고백한 대목을 옮겨본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 주셨던 모든 분들의 개관축하 물결 속에 전용극장을 갖춤으로써 기존 극단들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창단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 공연법 개정이 안 된 상태에서 극장을 개관했었고, 공연장 허가문제로 모든 준비를 해놓고도 활성화 시키지 못해 폐관과 함께 쓰라린 후유증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차가운 현실에 굴하지 않고 <쌍눈양배추의 욕망><센트럴파크의 여름><불의 나라><바람꽃><친구 미망인의 남편> 등등 수많은 작품을 극단 책임자로서 제작도 하고 연출도 했다. 정부지원금제도도 없던 때라 가난한 호주머니를 털어 개인극단 제작비로 오로지 연극 사랑과 열정만으로 젊음을 불태우듯 연극에 미쳐 살던 그였다.
그도 처음엔 배우지망생이었던 걸로 아는데 우리는 같은 세대의 6‧25 전쟁둥이로서 나의 통일연극시리즈 무대인 <조통수(祖國統一喇叭手)>와 <에케호모> 말고도 <레디고 인생><다함께 차차차><96><낙타를 위한 레퀴엠><이비야> 등등 작가와 연출 내지는 제작자로서 함께 손잡고 꽤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나도 서너 편 제작책임을 맡은 적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조통수>다. 요컨대 <조통수>의 작가와 실질적인 제작자는 나지만 극단과 연출은 물론 그였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춥고 배고프다’는 연극판에서 어렵사리 여러 편에 용케도 궁합을 맞춘 셈이라고나 할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참 빠르게 흘러가버린 야속한 세월이 고달팠던 것만큼 행복했었다는 생각도 염치없이 살짝 해본다.
내가 졸지에 그의 부고를 연락받고 고인의 극단 단원이기도 한 정완식 분장과 황진 연출 등과 함께 광명시 성애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영하, 문창길, 허기호, 나기수, 박병모, 김춘기, 이광휘 배우 등과 김정호 성우와 김종호 조명을 비롯한 심재찬, 송수영, 김동중, 조성일, 심정섭 연출 등등 평소 그와 가까운 선후배 친구, 지인들이 하나 둘씩 영안실에 모여들어 고인을 애도했다. 미망인과 두 딸, 사위가 문상객을 맞는다.
고인의 유해는 성남시 화장장을 거쳐 광명시립 추모공원인 메모리얼파크에 유족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의 기도, 찬송 속에 안치되었다. 그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켜보며 배웅하고 발길을 돌려 귀가하면서 나는 자신도 모르게 서울 종로3가 파고다공원 뒷길목을 찾았다.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된 탑거리예술극장하고도 그 주변 허름한 대폿집이다. 바로 그 없어진 옛 소극장이 <조통수>를 1991년 5월 초연한, 김연출과 나, 둘만의 개인 연극사적 현장 아닌가!
그 무렵은 어수선한 시국이라 주말행사처럼 데모가 유난히 잦았다. 경찰과 체루탄에 쫓긴 시위자들이 지하 극장을 소도(蘇塗)인 양 도망쳐와 황금주말 밤공연을 아예 못하게 망쳐놓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제 저 추억의 소극장도 김정택 연출도 모두 다 떠났지만, 한때 그와 함께 즐겨 드나들던 이 거리 대폿집에만 오면 언제든 연극 외길인생의 고집불통 고인을 불러내 막걸리 잔을 기울일 수 있다는 서글픈 환상에 젖어본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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