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인천강지곡’ 국보320호에 지정되다!
첫번째 이야기, 본보 1월 30일자 보도
‘월인천강지곡’ 국보320호에 지정되다!(1)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소헌왕후가 별세하자 석가모니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모아 한글로 편찬한 책)이 ‘훈민정음’ ‘동국정운’에 이어 국보 320호로 지정(2017년 1월 2일) 되면서 세간의 관심이 증대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월인천강지곡’ 국보지정에 견인차 역할을 담당한 유학영 선생(76세, 아래 사진)의 저서 월인천강지곡 해설 ‘하나의 달 일천 강에 비추다’의 글을 발췌 요약 해 3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월인천강지곡’과의 만남
‘월인천강지곡’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2006년 가을 어느 날 오후, 대한교과서(주)를 방문하였을 때에 김광수 회장님과 황태랑 사장님이 회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월인천강지곡’ 상권을 보여 주셨다. 아마도 내가 국문학 전공자라 생각하여 특별히 배려하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필자의 전공은 현대문학이고 ‘월인천강지곡’은 대학교 때 이름만 들어 본 터여서 처음은 그저 담담했다.
그러나 막상 ‘월인천강지곡’ 상권을 대하는 순간 나도 모를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세종대왕이 직접 지으신 이 귀중한 문헌을 눈앞에서 보게 되고, 비록 면장갑을 끼었지만 직접 만져 볼 수 있다니……. 그리고 500년도 훨씬 더 되었는데 얼마 전에 나온 책처럼 이렇게 깨끗하다니……. 보물 제398호라고 한다. 어찌 이 상권 한 책만이 천행으로 살아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 뒤 ‘월인천강지곡’에 대한 관련 연구와 학자들을 접하면서 ‘월인천강지곡’의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월인천강지곡’의 서지, 활자, 국어학 등의 외적 연구는 눈에 띠었으나, 불교적 또는 문학적 연구인 내적 연구의 결과물은 그리 많지 않았고 본격적인 연구도 시도되지 않은 듯했다. 또, 문화재적 측면에서도 다른 문화재에 비해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조선 초기 국어 국문학의 전적만 해도 국보는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뿐이었고 나머지 몇몇 전적들만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1961년에 세상에 현신한 뒤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어 줄곧 보물 수준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것은 상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께 죄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확실한 국보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간 만나 본 학자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월인천강지곡’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구체적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1년 (주)미래엔 교과서박물관의 관장을 맡으면서부터이다. ‘월인천강지곡’을 이대로 회사의 금고 속에 그냥 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월인천강지곡’의 문화재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아 안전하고 전문적인 보관, 관리 속에서 연구 자료로 활용될 필요가 있었다.
‘월인천강지곡’은 왕자가 저본을 만들고 왕이 곡을 지은 왕실 문헌 중의 왕실 문헌이며, 숭고한 불교의 교리를 담은 훌륭한 인성 교재이자 교과서이다. 일찍이 김광수 회장님의 탁견으로 우리나라 교과서 회사의 대명사인 (주)미래엔이 소장하여 간직해 온 것은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주)미래엔이 문헌을 박제화하여 그냥 묻어 두지 않고 이를 꺼내어 연구를 자극하고 그 가치를 높이고자 하고 있음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따라서 문화재적 가치의 승격과 전문적인 보관, 관리 및 연구 활용을 위한 방안은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였다. 그러던 중에 필자는 궁중 문헌을 보관, 관리하고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월인천강지곡’을 기탁하여 관리하는 방안을 발의하였다. 다행히도 두 기관은 이 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2013년에 실행에 옮겼고, 문화재적 가치의 재평가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하였다.
2014년에 (주)미래엔 교과서박물관은 원척 영인본을 제작하여 연구자들에게 제공하였고, 장서각 안승준 박사와 필자는 ‘월인천강지곡’의 소장 경로를 문헌 연구와 현장 답사를 통해 밝혀내었다. 그리고 2014년에는 두 기관 공동 주최로 학술 대회를 개최하여 ‘월인천강지곡’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등 문화재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학술적 성과를 꾸준히 만들어 나갔다.
마침내 2017년 1월 2일에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불교학적, 국어국문학적, 출판 인쇄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여 국보 제32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전적으로는 ‘훈민정음’과 ‘동국정운’에 이어 세 번째로 국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9월 26일에 두 기관은 국제 학술 대회를 열어 그 가치를 국내외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은 읽을수록 매료되는 문헌으로, 외적인 가치와 의의뿐만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과 상징, 문체 등이 심연과도 같이 깊다.
이 개설서는 깊이 있는 연구라기보다 ‘월인천강지곡’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느껴 보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 보편적인 해설서이다. 제1부에서는 ‘월인천강지곡’을 개관하면서 특이점을 살펴보고 편찬, 구성, 내용, 서지 등을 항목별로 상술하였고, 제2부에서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498.5곡 모두를 원문과 함께 현재어 풀이를 수록하여 전체적인 조감과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연구가 부족한 필자에게 이러한 작업은 분명히 한계가 있는 일이었지만, 배우는 자세로 읽고 또 읽고 찾아보고 생각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값진 보람을 얻었다.(중략)
‘월인천강지곡’과의 만남은 필자에게 적지 않은 과제도 주었지만 깊은 감동을 심어 주었다. 지난 몇 해 동안 필자의 삶과 가슴 한 귀퉁이에 어느새 ‘월인천강지곡’이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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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 본보 2월 19일 보도
‘월인천강지곡’국보320호에 지정되다(2)
'하나의 달 일천 강에 비추다'
「월인천강지곡」 개관
월인청강지곡(月印千江之曲)은 세종대왕이 친히 석가의 공덕을 칭송하여 한글로 지은 악장(樂章)을 말함과 동시에 이 악장을 수록한 책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악장은 583곡으로 추정되는데 실제로 확인된 것은 498.5곡이며, 84.5곡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확인된 498.5곡 가운데 원간본으로 볼 수 있는 곡은 상권의 194곡과 『석보상절』 권 6, 권 9, 권 13에 끼어 있는 낙장에 실린 중권의 3곡 등 197곡뿐이며, 나머지 301.5곡은 세조가 다소 손질하여 『월인석보』에 수록하였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 당대에 상, 중, 하 세 권으로 간행되었으나 현재 상권만 전해진다. 「월인천강지곡」 상권은 효령 대군에 의해 부안 실상사 본존불상의 배 속에 불복장(佛腹藏)된 이래 495여 년간 불문(佛門)에 있다가 1961년 세상으로 나와 알려졌다. 1972년 7월 21일부터 ㈜미래엔이 소장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는 전문적 보존과 학술적 활용을 높이고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탁하여 관리해 오고 있다.
이 전적(典籍)은 1963년 보물 제398호로 지정되었으나 불교학적·국어국문학적·출판 인쇄사적 가치가 매우 높아 2016년 11월 8일 국보 승격이 예고되었고, 2017년 1월 2일 국보 제32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전적으로서는 『훈민정음』, 『동국정운』에 이어 세 번째로 국보가 된 것이다.
「月印千江之曲」은 어떤 책인가?
세종 28년(1446년) 3월 24일에 소헌왕후가 별세하자 세종대왕의 명으로 수양대군이 중국에서 편찬된 승우(僧祐)의 『석가보(釋迦譜)』와 도선(道宣)의 『석씨보(釋氏譜)』를 합하여 한문본으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다. 이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정음(正音)으로 번역하여 진상하자 세종대왕이 이를 보시고 첩제(輒製: 즉시 지음)하시어 훈민정음으로 찬송(讚頌)을 지어 「月印千江(之曲)」이라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훈민정음』의 등장과 함께 어문, 찬가, 불서 등의 문헌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은 1차적으로 텍스트라 할 수 있는 『석보상절』과 2차적으로는 구성과 형식을 공유한 「용비어천가」, 표기에서 서로 영향을 주거나 충돌하는 『훈민정음』 및 『동국정운』과 함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편찬, 간행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은 뒷날 세조가 편찬한 『월인석보』에 재수록되었고 해설문으로 『석보상절』이 합편되었다.
『석보상절』은 세종 28년 1446년 3월 27일에 착수하여 같은 해 5월 18일에 한문본의 일부가, 10월 4일에는 한문본 전체가 1차 완료되었으며, 이어 12월 2일에 김수온에 의해 증보, 수찬이 시작되면서 정음으로 번역이 시작되었고 1447년 7월 25일에 정음본(한글본)이 완성되었다. 「월인천강지곡」은 『석보상절』 한문본이 1차 완료된 시기부터 착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보상절』 한글본이 완성되자 본격적인 편찬을 시작하였고, 표기 방식 등으로 볼 때 『동국정운』의 원고가 정리된 1447년 9월 29일 이전에 완성되어 1448년 9월 이전에 『석보상절』과 함께 간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헌왕후 별세로부터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석보상절』 한문본과 국역본(24권)이 편찬되었고 이어서 「월인천강지곡」(3권)이 함께 간행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월인천강지곡」의 편찬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1)무엇보다 왕후를 추천(追薦)한다는 거스를 수 없는 명분이 있었고, (2)새로 제정한 훈민정음의 문장 적용을 시험해야 했으며, (3)불경을 훈민정음으로 간행하여 쉽게 독송(讀誦)할 수 있도록 하여 백성과 불교를 순화하며, (4)백성의 가장 큰 괴로움인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세종대왕의 뜻이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두 책을 편찬하고 간행한 일은 서로 별개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일로 연계되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효율적인 진행이 가능했을 것이다. 동시대의 전적(典籍) 가운데 유독 이 두 책만이 금속 활자를 사용한 것도 이를 방증하며, 또 빨리 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음호 계속 「월인천강지곡」은 부처의 공덕을 찬불하는 악장(樂章)이다.)
글/ 유학영. 정읍출신, 서울대, 성균관대학원(박사)을 거쳐 교육부장학관, 편수관, 교과서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저서로는 ‘1950년대 한국 전쟁·전후 소설 연구’ ‘월인천강지곡 해제와 가치’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월인천강지곡의 부안 실상사 소장 경위와 그 전래 과정’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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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이야기, 본보 3월 12일 보도
‘월인천강지곡 국보320호에 지정되다(3),
「월인천강지곡」은 부처의 공덕을 찬불하는 악장(樂章)이다
구성과 형식은 앞서 만들어진 같은 장르의 장편 악장인 「용비어천가」와 유사하다. 곡을 이루는 2행은 동일한 율격적 형태를 갖는다. 즉 앞의 2구는 2음보로 규칙화된 고정성을, 마지막 구는 2, 3, 4 세 가지 음보로 불규칙적인 가변성(可變性)을 보인다. 곡(曲) 전체의 틀은 ‘서사(序詞)-본사(本詞)-결사(結詞)’로 짜여 있으며, 서사와 결사는 각각 2개의 곡을 놓고 본사는 많은 삽화(揷話)를 엮어 주제를 전개한다.
「월인천강지곡」은 곡 이름(제명)을 통해 부처님의 공덕과 전법륜(轉法輪)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月印千江’이라는 제명(題名)은 달은 번뇌를 식혀 주는 맑고 서늘한 도리(道理)이며, 부처의 삼신(三身)을 달에 비유하여 하나뿐인 달[法身]이 일천 강에 비추는 달빛[報身]과 달그림자[應身]를 불신의 삼신(三身)의 작용으로 아우른다. 달과 강을 표상으로 하여 전편을 관통하는 불신(佛身)의 오고 가심, 끼침과 계심의 노래라는 것이다.
▶서시(序詞) 其1, 其2는 세존의 무량무변한 공덕을 말하면서 당부로 장을 연다.
서두에서 높고 높은 부처님의 공덕이 다 말할 수 없이 크고 많으심을 말하며, 화자(話者)는 세존의 일과 말씀을 눈으로 보는 듯 귀로 듣는 듯 여기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서장이 열리면서 부처의 깊고 장엄한 메시지를 담은 악장은 시작된다.
▶본시(本詞) 其3~581은 세존의 성스러운 행적과 깊고 장엄한 메시지가 서사(敍事)로 펼쳐지고 교술(敎述)된다.
「월인천강지곡」은 부처의 일대기와 전법(轉法)을 대체로 순차적으로 놓고 교술해 나간다. 석가는 고귀한 혈통을 지닌 석씨 가통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닌 왕자로 태어나 화려하게 살던 중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하며, 온갖 고통을 겪는 수도로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한다. 열반에 들어서는 그 진신 사리가 봉안되고 모든 이가 신앙하기에 이른다.
1)전생-성불(80곡 전생-탄생-궁중 생활-출가-수도-성불)
2)전법(437곡) 법륜(法輪), 교화(敎化), 발고여락(拔苦與樂), 영산회(靈山會) 설법, 성불의 인연
3)열반(57곡)
4)불교 포교 (5곡)
이와 같은 과정을 석존 일생의 8장면으로 압축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에 대응해 볼 때, 「월인천강지곡」의 ‘전생’ ‘궁중 생활’ ‘불교 포교’의 내용을 제외한 대부분은 여타의 불전(佛典)에 대체로 대응된다. 마명(馬鳴)의 「불소행찬」(佛所行饌)과도 대응해 보면, 서술하는 내용은 유사하나 「월인천강지곡」은 석가의 전생(「불소행찬」에는 없음.)과 전법을 비중 있게 배치했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이 곡은 창제 목적이 왕후의 추천을 위해 불경을 만든 것에서 시발하였던 만큼 전편을 찬불 내용으로 구성하여 장엄하고도 성스러운 기운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본사 579곡 중에서 437곡 대부분은 교화의 성격이 짙은 곡이다.
이는 『석보상절』 등 앞선 발간물의 내용 가운데에서 추천 의식(追薦儀式)보다는 효양(孝養) 등 보은(報恩)을 강화하여 비중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대왕의 백성과 불교 순화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월인천강지곡」은 찬불가이면서도 영웅 서사적 유형으로 전개하는 삽화도 보인다. 석가는 대자대비한 불교적 인물인 동시에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그려진다. 유불겸비(儒彿兼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 것이다.
▶서시(結詞) 其582, 其583은 불신(佛身)의 오고 가심에 대하여 화자는 스스로 묻고 답한다.
앞의 곡에서 석존의 육신은 멸도 하였지만 법신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갔는지 묻고, 뒤의 곡에서는 이에 답하여 전도(顚倒)된 중생은 모르지만 법신은 눈앞에 가득히 계심을 노래한다. 실(實)에 의거하여 자취로 보면 부처님이 오고 가심이 있지만, 법신(法身) 의거하면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으며 마치 달이 일천 강에 비춤과 같이 눈앞에 가득하다고 매듭짓는다.
석존의 멸도로 인한 허허로운 무상(無常)보다 하나뿐인 달, 영구불멸의 법신이 계심을 깨닫는 불심(佛心)을 당부한다. 불교에서 달은 중생의 뜨거운 번뇌를 없애 주는 맑고 서늘한 도리(道理)이며, 강과 함께 비유해서는 달은 불신(佛身)이 된다. 참으로 절묘한 상징과 비유이다. 그래서 그 전제 속에서 엮어지는 「월인천강지곡」은 서정에 넘치는 불경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문학 작품이 된다.(중략)
「월인천강지곡」은 문화 인류학적·불교학적·국어문학적·출판 인쇄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높은 귀중한 문화재이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매우 심오한 인성 교재이며, 백성으로 향하는 임금의 사랑과 염원이 담긴 궁중 문헌이다. 「월인천강지곡」과 같은 한글 문헌이 아니면 570여 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쓰던 당시의 말소리를 어떻게 알고 정서를 느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문화재가 자랑스럽고 더욱 소중하다. (끝)
글/ 유학영(교육부 장학관, 편수관, 교과서박물관장을 역임)
‘월인천강지곡’ 국보320호에 지정되다!
유학영 작, '월인천강지곡' 해설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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