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학자 심우성이 만난 ‘소중한 민속예술가’
서울 시청 앞으로 향하는 명창 임방울 선생의 장례행렬
민속학자 심우성이 만난 ‘소중한 민속예술가’
‘쑥대머리’ 명창 임방울
가객 문중의 후예로 태어나다
아직도 판소리 애호가들은 명창 임방울을 잊지 못한다. 쉰여섯이라는 비교적 짧은 일생이었는데도 그의 소리가 당시 조선팔도를 풍미하였으며 아직도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 임방울의 본디 이름은 임승근이며 전라남도 광산군 송정리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의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광대의 계통이었던 외가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당대의 명창 김창환이 외삼촌이니 두말나위도 없이 혈연으로서도 소리꾼의 후예라 하겠다. 소년 임방울은 열네 살에 박재실에게 춘향가와 흥부가를 배운다. 처음에는 소질이 없다며 소리공부 포기할 것을 주위에서 일렀지만 그는 가정도 버리다시피 하면서 화순에 있는 만년사 등 명승대찰을 찾아 독공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첫사랑의 연인 월녀와 헤어지게 되는 등 시련이 계속 되었지만, 오히려 공창식, 유성중, 김봉이, 조몽실의 문하를 거치면서 ‘득음’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이 되던 해 외삼촌 김창환의 주선으로 당시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전국명창대회’에 참가 ‘쑥대머리’로 입상하면서 일약 이름을 떨친다. 레코드회사인 ‘콜롬비아’ ‘빅터’ ‘오케’ 등이 앞 다투어 그를 전속으로 삼으며 판을 찍어 내더니 ‘쑥대머리’ 판이 나오면서는 아주 임방울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의 축음기 보급률로 볼 때 20만 장 이상을 팔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 하겠다.
한편 임방울이 인기를 독차지하기 시작한 1930년대의 후반으로 가면 전통적인 판소리 시대는 지나고 창극의 시대로 접어드는 때였다. 혼자서 부르던 판소리를 배역을 나누어 여럿이 분창하며 꾸며대는 새로운 창극이 대중의 호응을 받으니 모든 소리꾼들이 그쪽으로 쏠렸지만 임방울은 몇 번 참여한 것 외에는 본격적인 판소리의 외길을 고집한다. 전통적인 소리광대로서, 만인의 사랑을 받는 가운데 특히 화류 예기들이 그를 독차지 하고자 온갖 유혹이 끊이질 않았으니 결국 평온한 인생을 누리지도 못했다.
동편제, 서편제 함께부른 임방울
본명이 임승근인데 어찌하여 ‘방울’이란 예명을 지니게 되었는지 그 내력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목구성’이 하도 뛰어나다 보니 이러한 이름이 붙지 않았는가 싶다. 높은 소리, 낮은 소리를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청구성’에다, 약간 거친듯하면서도 구수하게 곰삭은 소리인 ‘수리성’을 겸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타고난 소리꾼이라 하겠다.
서편제란 구슬픈 계면조를 이르고, 동편제란 우람한 우조를 이르는 데, 보통 가객들은 이를 한 유파로 삼아 구별하려 했으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단 한사람의 창자가 여러 배역을 맡아 1인 100역을 하는 것 판소리의 특성인제 어찌 서편제, 동편제를 가리느냐 했다. 그는 노랫말과 가락에 따라 장, 한, 화, 원을 그때 그때 적절하게 구사했다.
어떤이는 임방울의 소리가 계면조에 가깝다고도 하지만 그가 만년에 자주 부른 ‘적벽가’중의 ‘적벽화전’ 대목을 부를 때면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우조의 세계를 구가하고 있다. 판소리의 중시조라 할 신재효는 판소리 가객의 4대 요건으로 ‘인물’ ‘사설’ ‘득음’ ‘너름새’를 들었다. 임방울은 이 네 요건을 고루 갖추었다.
‘인물’로 치자면 소시에 마마를 앓아 살짝 얽기는 했지만 시원한 자태였고, ‘사설’도 남다른 독공으로 난해한 한자까지 환하니 노랫말의 뜻이 명료히 전달되었다. ‘득음’이란 소리하는 법도를 터득함이오, ‘너름새’란 아니리(대사), 발림(몸짓), 소리(창)가 적절히 조합될 때 느끼게 되는 가객의 풍모를 뜻하니 임방울이 바로 그였다. 유파를 초월하여 소리의 모든 창법에 통달했던 임방울은 토막소리라 할 창극이 전성기를 이루던 시절에도 오로지 본바탕 판소리를 지킨 인물로도 기억되리라.
시청 앞 광장을 메운 문상객들
임방울은 1961년 3월 8일 쉰여섯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장례식은 3월10일 ‘국악인장’으로 치러졌다. 상여행렬이 길게, 길게 서울 한복판을 누비다가 시청 앞 광장에 이르다 국악인뿐만 아니라 그를 아끼던 시민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니 상여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생전에 가장 가까웠던 연인 ‘김산호주’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그 유명한 느린 진양조의 구슬픈 노래가 한구석에서 은은히 들려왔다.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데 당신의 혼은 어디로 행하셨나요. 황천이 멀고먼데 그리 쉬베 가려는 가...” 이렇게 하여 일세의 명창이요, 만인의 연인이였던 임방울은 몇 장의 소중한 그의 소리를 음반에 남기고 황천길로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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