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플러스/ 김대중 서거 13주년 추모
김대중의 평화 사상
“영원한 것은 국가 이익밖에 없다. 어느 나라든 외교의 제1목표는 국익이다”
본고는 이재봉 교수가 지난 2022년 8월, 김대중평화센터와 김대중추모사업회가 목포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에서 공동주최하는 <김대중과 만델라, 세계 지도자의 평화사상>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글 중 발췌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나는 이전 글에서 “김대중은 경제 및 안보. 통일 분야에서 전공학자 못지않거나 전문가를 능가하는 이론가”라고 썼다. 이 글에선 그가 새내기 정치인 때부터 국제정치 전문가로 시작해‘외교의 달인’이 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1992년 러시아 외교대학에 정식 논문을 제출하고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진짜 학자가 되기도 했다.
김대중은 한국전쟁 중 1950년 북한군에 체포돼 목포형무소에서 총살 직전 탈출했다. 1952년 이승만의 독재정권 연장 시도에 따른 부산 정치파동에 큰 충격을 받고 정치에 뛰어들기로 했다. 반북반공 및 반독재 정신으로 정치를 준비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일본 시사잡지를 구해 읽으며 국제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김대중이 1950년대 중반 정계에 입문해 정치 스승으로 삼은 두 사람이 미국통 외교전문가였다.
첫째, 장면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정부 수립 직후 제1대 미국주재 대사와 국무총리를 거쳐 부통령을 지냈는데, 1956년 김대중이 천주교 영세를 받을 때 대부가 됐고, 민주당에 입당해1960년 부터 대변인으로 활동하도록 이끌었다. 참고로 미국 국무부는 4월 혁명 직후 한국 새 정부를 이끌 지도자로 친미적 장면을 점찍었다. 그를 대통령으로 세우면 “그의 성실성과 국제정세에 관한 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정일형은 미국에서 사회학, 철학, 법학을 공부하고 1960년 장면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냈는데, 1967년 신민당이 들어서자 부총재가 되어 대변인 김대중과 함께 활동했다. 1970년 김대중이 대통령 후보가 되자 선거사무장을 맡아 그의 미국 방문을 주선했으며 미국 내 인맥을 총동원해 그의 방미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미국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아내 이희호도 국회의원 김대중의 미국 공부에 도움 주었다. 1960년대부터 남편을 돕는 일이 “신문을 샅샅이 읽어 정책 제안에 도움이 될 만한 기사를 스크랩하는 일”이었는데, 영자신문도 빠뜨리지 않고 챙겼다. “국제정세를 보는 미국의 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대중이 정치 초년생 시절부터 달변의 국제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더 큰 요인은 ‘10분 대정부 질문을 위해 10시간 준비’하는 등 노력과 자질이 곁들여진 풍부한 독서량에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김대중의 미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본다. 1960-80년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의 사례 5가지만 소개한다.
첫째, 1961년 2월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됐을 때다. 혁신정당과 진보적 사회단체 및 대학생들은 그 협정이 한국의 대미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도록 하는 불평등 조약이라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그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양키 고우 홈!” 구호와 함께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이 전개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 연설회가 열렸다.
이 협정을 통해 한국을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야당과 무소속 그룹 대변인들에 맞서 여당 민주당 대변인 김대중이 나섰다.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협정이 매국 행위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회의원도 아닌 그의 설득력 있는 연설은 결국 청중의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장면 총리는 크게 칭찬했고, 혁신정당은 반대시위를 철회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정치철학을 가장 잘 드러내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명언을 1967년쯤부터 써왔다고 한다. 이를 사업가 출신의 초보 정치인 시절부터 익혀온 것이다.
둘째, 1964년 3월 한일협정 체결을 앞두고 있을 때다. 미국은 1949년부터 한일협정을 중재하면서 이승만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혀 주춤하다, 1961년 박정희가 집권하자 1962년부터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로 설정하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하던 터였다. 윤보선 야당 총재가 앞장서 한일협정에 결사반대하고, 야당과 각계 대표 200여 명이 ‘대일 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2년 차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은 ‘한일회담 무조건 반대’에 동의하지 않았다.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미루면 세계의 흐름을 놓치고, 한국만 고립되리라 우려했다. 더구나 미국의 권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북한, 중국, 소련에 둘러싸인 한국이 일본까지 잠재적 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무턱대고 반대할 게 아니라 당연히 추진하되, 무엇을 얻을 것인가 고민하며 협상에서 불이익이 없도록 유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박정희 정권이 형편없는 내용의 협약에 서명하고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시키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에게 돌아온다며 감정만을 앞세워 국익을 팽개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대안을 마련해 ‘조건부 반대’를 줄기차게 주장한 것이다. 윤보선과 야당 강경파는 “한일 국교 정상화는 매국이며, 매국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윤보선은 수십만 학생들 시위의 선두에 서겠다고도 했다. 김대중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면 정부는 틀림없이 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며 말렸다.
셋째,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사태’와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해군 장병 80여 명이 탄 정보함정 푸에블로호(USS Pueblo)가 북한 초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북한이 늦어도 1966년 말부터 북베트남을 돕기 위해 남한의 남베트남 파병을 막으려고 비무장지대에서 다양한 ‘도발’을 늘려온 터였다. ‘1. 21사태’와 관련해, 박정희는 자신을 살해하려던 북한에 대해 보복하길 원했지만, 미국은 어떠한 보복 조치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을 동해로 파견하는 한편 폭격기 수십 대를 미국과 일본에서 남한으로 옮겼다.
김대중이 1968년 2월, 국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힘으로 국방을 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국토를 통일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하고, 내 힘으로 경제를 이끌어나가지 못한 약소민족의 비애, 믿고 또 믿은 우방국가라 하더라도 결국 이해가 상치될 때는 자기 나라 이익이 제1차로 취급되고, 약소민족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뼈저린 설움과 좌절감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넷째, 1969년 7월 괌에서 닉슨(Richard Nixon) 미국대통령이 베트남전쟁 패배 및 미군 철수와 관련해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 하라'는 내용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발표했다. 이른바 ‘괌 독트린(Guam Doctrine)’ 또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이다. 김대중은 1970년 3월 닉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외교정책의 문제점 2가지를 지적했다.
첫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탈미국 정책을 급격하게 추진하면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을 고무시킬 우려가 있다.
둘째, 일본이 아시아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엔 문제가 많다.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이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두 달 뒤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뽑혀 ‘4대국 안전보장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미국, 소련, 일본, 중공 등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이 한반도에서의 전쟁 억제를 공동으로 보장하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내가 요즘 국제정치나 한반도 주변정세와 관련해 글이나 강연을 통해 즐겨 쓰는 대목이 있다. “국제관계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은 친구가 되는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것은 국가 이익밖에 없다. 어느 나라에게든 외교의 제1목표는 국익이다”는 내용이다. 김대중이 반세기 전 주장했던 말이다.
다섯째,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전개됐다. 전두환 군부가 김대중을 핑계로 학살을 저지르고 김대중에 대한 사형까지 저지르려 했다.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역할과 관련해 한국에서 반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1980년대 내내 급속적이고 지속적으로 폭넓고 강렬하게 전개됐다. 반미운동과 관련해 김대중은 1987년 9월 <월간경향>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친미 할 필요도 없고, 반미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국가 이익대로 상대하면 됩니다. 이익에 맞으면 협력하고, 안 맞으면 비판하면 됩니다. 미국에 대해 사촌같이 매달리는 것도 사대주의이지만, 잘 안 해준다고 토라져서 마구 화내는 것도 역사대주의입니다.” 숭미와 반미를 비판하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대미 외교를 강조한 것이다.
글/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평화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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