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포크음악의 레전드 한대수
대한민국에 ‘청년문화’라는 문화가 있었다. 1970년대 이야기다. 당시 세계는 베트남 전쟁으로 시끄러웠다.
특히 미국에서의 반전주의와 함께 히피(hippie)라는 새로운 인종(?)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들은 탈사회적(脫社會的)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 베트남전쟁을 거부하고, 진부한 물질문명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는 등 나름대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히피들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큰 사회 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70년 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어떠했을까? 바로 ‘청년문화’라는 문화로 시끄러웠다. 다만 독재정권 때문에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나라 제1호 히피’ 한대수
우리가 지금에 와서 왜 한대수를 재조명 하는 것일까? 먼저 그의 과거를 한 번 살펴보자.
1948년 3월 12일생인 그는 미국 뉴햄프셔대학교 수의학과를 중퇴했다. 현재 그는 22세 연하의 몽골계 러시아인 아내 옥사나 씨와 59세에 낳아 올해로 4세인 딸 한양호 양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핵물리학자 아버지와 피아니스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아주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만나러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천재 물리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미국 정부와의 불화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후 미국에서 생활한 그는 뮤지션과 사진가,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1968년 송창식, 윤형주, 조영남과 함께 '세시봉'에서 데뷔했다.
사실 이 같은 과거는 이제 그에게 별 의미가 없다. 다만 한대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듯이 자신의 인생은 로큰롤(rock'n'roll)이기에 그렇다는 생각이다.
"인생이 그렇잖아. 옥사나 스물두 살에 뉴욕에서 처음 만났을 때 육체미에 반했어요. 아주 예쁘고 늘씬했다고. 완전히 제시카 고메즈였다니까.
게다가 월스트리트의 증권회사에서 관리부장까지 했어요. 연봉을 10만 달러나 받았다고. 그런데 이렇게 됐잖아. 한 여자(옥사나)는 완전히 알코올 환자지, 또 다른 여자(양호)는 꼭 보살펴줘야 하는 네 살짜리지,
나는 두 여자의 늪에 빠졌어요.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이게 로큰롤이지 뭐야" 참고로 로큰롤은 미국 남부 흑인들의 독특한 대중음악 형태인 블루스에 강한 비트가 가미된 리듬 앤드 블루스(Rhythm & Blues : R&B)에다 미국 남서부의 카우보이·광부·농부 등 백인 육체노동자들의 통속적인 대중가요 컨트리뮤직이 적당히 뒤섞여 젊은이 취향에 맞게 만들어진 대중가요 형태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자연스럽게 히피가 되어 귀국한 한대수는 첫 음반 ‘멀고 먼 길’을 발표했었다.
이 음반에는 그가 18살 때 만들었다는 ‘행복의 나라로’와 ‘바람과 나’라는 한국 포크음악의 명곡이 담겨있었다.
또한 아프리카 악기인 카주 소리를 그의 목소리만큼 격렬하게 토해내는 ‘물 좀 주소’도 있었다. 당시 신세계 음반에서 나온 이 데뷔앨범은 우리나라 포크음악에 던진 파장은 엄청났다.
특히 ‘행복의 나라로’는 포크가수라면 의례히 음반에 한 번 정도는 넣어서 불렀고 자작곡만을 부르는 고집불통의 김민기마저도 ‘바람과 나’만은 그의 음반 속에 담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행복의 나라로’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원했지만 결코 행복한 노래가 되질 못했다. 당시 이 땅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거리에서는 경찰들에게 머리가 장발이라며 삭발을 강요당했고, 젊은이들의 노래는 혼란의 주범으로 몰렸고, 사회는 종신 총통을 꿈꾸는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질식 할듯한 공기로 가득했었다.
자유와 평화는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가장 큰 화두
그리고 한대수는 1975년 이 땅을 떠났다. 노래를 자유롭게 부르기 위해 스스로 나그네가 되어 외로움을 그리움으로 바꾸기 위해 택한 것이다.
그리고 안주할 땅을 갖지 못한 정신적 유배자로서 자유롭고 고독한 나그네의 혼이 뿜어내는 아름답고 끊이지 않는 노래를 계속 불렀다.
미국을 선택한 한대수는 록 밴드 징기스칸을 조직,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또 전업 사진작가와 시인으로 활동했는데 그의 가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시인으로도 실력이 대단해 미국 비평가협회에서 주는 상을 두 번이나 받기도 했다. 어느 정도 실력이냐 하면 그는 2002년 잠언집 '침묵'에 짧은 글들과 사진을 실어 펴내었는데 그중 ‘'To know that you don't know takes a lifetime to know(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평생이 걸린다)'와 'We are all sentenced to life(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가 있다.
80년대 잠시 귀국했지만 그에게 이 나라는 언제나 힘들게 했다. 영어로 가사를 적었다는 이유와 여전히 퇴폐적이란 딱지를 받고 시중에 보급되지 못 했다.
이렇듯 이 사회는 아직도 그에게 신뢰를 주지 않았다.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래서 그에게 외로움은 언제나 그리움이었다.
"큰 평화는 작은 평화에서부터 시작하고 작은 평화는 아주 사소한 관계에서부터 시작해. 가장 가까운 가족, 부모, 친구, 부부 등 가깝기에 쉬운 것 같지만 오히려 가장 어려운 관계야. 바로 내 옆에 있는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인간관계의 신뢰를 지키는 일부터가 바로 작은 평화의 시작이야"라며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에게 있어 자유와 평화는 어느 장르를 막론하고 가장 큰 화두였다.
나는 내 음악으로부터 인생의 도움 받아..
지난 8월 모 방송에 출연한 그는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아내 옥사나 씨와 59세에 낳아 올해로 4세인 딸 한양호 양에게 온 마음을 다해 아내와 딸을 보살피며 "아침을 먹을 때마다 아내와 딸을 위해 기도한다"며 "괴롭고 고통스러워도 희생정신을 잃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이어 딸이 결혼하는 것까지 봐야하지 않겠나? 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건 완전히 욕심이다.
양호 시집 갈 때까지 살아 있는 것은 욕심이지만 가능하면 그러고 싶다"고 답했다. 또 "예순이 넘는 나이에 얻게 된 딸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난다.
삶에 대한 욕심이 생겼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고 딸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한대수의 1969년 남산 드라마센터 리사이틀 기억하고 있다.
이 리사이틀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깊게 각인된 공연이었다. 이날 공연은 조명을 모두 끈 암흑 속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어 어디선가 향이 피어오르고 한대수가 커다란 톱을 연주하며 등장했었다. 이날 한대수가 들려준 노래 중 상당수는 그가 18세 때 작곡한 것들이었다.
팝송 번안곡이 포크가수들에게 대수였던 당시에 이런 한대수의 무대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벌써 60대 중반에 들어선 그에게 본인의 음악을 평가해 달라는 말에 그는 "내 음악을 내가 평가하라? 나는 내 음악이 제일 좋아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최고라고 생각해.
하하하. 남이 인정하든 않든 상관없어. 고통 받는 인생들에게 도움이 된다고요. 나는 내 음악으로부터 인생의 도움을 받아요" 라고 한국 포크음악의 레전드인 한대수는 비록 대중친화적인 가수가 아니지만 그의 음악세계는 언제나 자유와 평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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