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헤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 원장의 삶과 예술세계 3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 죽으면 죽으리라
지난 9월15일(목)오후7시, 북경기신문 노종호 홀에서 열린 통일문화재단(이사장/서기원) 주최, 2011통일 가을논단에는 '나는 성혜림의 친구였다'의 저자 김영순 원장(74세, 최승희 무용교육원)을 초대, 그녀가 경험한 북한의 삶을 통해 북한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그가 고백한 이야기를 3번에 나눠 연재하는 중 마지막 회다.(편집자 주)
-(현성주 편집국장)요덕 수용소에서 나와 어렵게 함흥에 정착했고, 바느질을 하며 안정을 찾아 갔는데 왜 탈북을 생각하게 됐습니까?
=(김 원장)보위부의 끈질긴 감시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평양중앙보위부 고위간부가 나를 보위부로 불렀습니다. 그는 ‘성혜림은 김정일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새빨간 유언비어다. 어디서 들었다거나 유발(발설)할 때는 용서치 않겠다’며 나를 압박했고, 나는 일주일간 잠을 자지 못하며 요덕수용소의 생활이 어른거렸다. 그러던 1989년 막내아들이 조선족과 함께 탈북을 시도하다 잡혀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 평생 짐승처럼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저 세상에서 편히 눈을 감으라고 명복을 빌면서 이젠 이곳은(북한) 내 나라도 내 조국도 아니라 원수의 나라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경로로 탈북 했습니까?
=막내아들이 총살당한 후부터 탈북을 꿈꿨으나 감시 받고 있는 처지라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97년 북한은 식량부족으로 집단 아사자가 생기기 시작했고, 많은 북한주민은 앉아서 죽는 이, 식량을 구하러 이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식량을 구하러 무산에 있는 세관을 거쳐 잠덕이라는 곳을 거쳐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 화룡현과 투도진을 통해 연길로 가 외사촌 동생을 만났다. 외사촌 동생은 한사코 남한으로 가라는 권유가 있었지만 함흥에 남아 있는 큰 아들을 두고는 갈 수가 없어 식량을 구해 함흥으로 돌아갔다. 함흥에 돌아온 나는 모든 것을 팔아 6만원(북한돈)을 만들고 아들과 함께 탈북을 결행하기 위해 준비에 착수했다. 우선 1천4백원을 주고 비법(불법)으로 군부여행증를 구입했고, 남이 의심하지 않도록 좋은 옷도 구입했다. 그리고는 300원을 주고 두만강1열차 침대칸을 타고 국경지대인 온성지역에 도착. 어두움을 틈타 얼어붙은 두만강을 도보로 건너 중국 도문으로 들어갔다. 추운겨울보다는 국경수비대나 공안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문에 도착하자 70원을 주고 택시로 연길로 들어갔습니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어떻게 왔습니까?
=다음날 연길의 조선족 목사님을 만나 대한민국으로 정치적으로 망명하는 방법을 의논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중국어를 할 수 있어 상지반점이라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으나, 아들은 중국어를 하지 못해 기독교 계통의 미션 홈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일한지 2년6개월 만에 드디어 탈북을 돕는 브러커를 만나 탈북을 시작 했다. 우선 길림을 떠나 하얼빈으로 하얼빈에서 왕청으로 갔으나 당시 사스가 창궐하여 비행기 이동을 포기하고 육로로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는 남, 낮을 가리지 않고 4일간 달려 중국 최남단 광서성 남녕에 도착했다. 캄캄한 밤에 이름도 알 수 없는 국경도시에서 배를 타고 15분가량 강을 건너니 베트남 땅이 나왔다. 베트남 국경에서 오토바이와 버스를 번갈아 타며 하노이에 도착했으나 도움을 줄 목사님의 전화번호를 잃어버려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하노이 길거리에 있는 한국 간판을 보고 들어가 한국인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한국인들은 친절하게 캄보디아에서 NGO활동을 하고 있는 서병도 목사님을 소개해 줬고, 우리는 목사님의 도움으로 태국을 거쳐 2003년 11월 아시아나 항공에 탑승, 꿈에 그리던 대한민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비행기가 이륙 할 때 이젠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감격의 눈물이 흘렀고, 지난날 질곡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요?
=현재 자유의 소중함을 만끽하고 살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북한관련 여러 단체(최승희 춤 발전회장, 최승희 무용교육원장, 북한민주화위원회 여성회장, 자유북한방송운영위원장, (사)북한민주화운동본부 대표이사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건강이 허락하는 한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마지막 생을 다 할 생각이다.
다음은 질의 응답시간으로 질문하실 분은 질문 바랍니다.
-유태영(목사)입니다. 뮤지컬 요덕스토리 등 북한 참상을 고발하면서 다니는데 협박이나 방해는 없는지요?
=협박과 방해는 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최송림(희곡작가)입니다. 버들피리의 작가이신 이기용 선생과 아들 이평은 김정일에게 성혜림을 빼앗긴 다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이기용 선생은 말년까지 김정일이 잘 해 준 것으로 알고 있고, 성혜림의 남편인 이평에 대한 소식은 그 후 듣지 못했습니다.
-정영수(명장, 前시민예술대학교장)입니다. 한국에서 최승희 무용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소리가 많은데?
=최승희 선생님에게 사사 받았고, 최승희 선생님의 작품에 참여했던 사람으로 최승희 선생의 춤사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 경험이 대한민국에서 최승희 맥이 이어지는데 작은 일조라도 하는데 노력 하고자 합니다.
-서기원(통일문화재단 이사장)입니다. 이번 김영순 원장님의 강의가 북한을 새롭게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강의해 주신 김영순 원장께 마음으로부터의 깊은 박수를 보냅니다.(모두 기립 박수)
정리/하창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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