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곡산장, 재건해야 한다1
의정부와 흥선 대원군
1873년 11월3일 고종은 마침내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으로 하여금 경복궁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에 대원군은 운현궁을 떠나 충남 덕산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소에 들러 성묘를 마친 다음, 곧장 의정부 직곡산장(의정부시 가능3동 동사무소 뒤쪽)으로 돌아온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에 따라 시비가 분분하다. 박은식이 쓴 ‘한국통사’에서는「동주철벽」같이 굳어진 누세의 온갖 폐풍과 악습을 대원군은 단번에 때려 부쉈으니 그는 진실로 이 나라 정치상의 대혁명 가였다. 그는 아깝게도 외교지식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배척을 위주로 쇄국을 고집하다가 복심이 변란이 터지게 되어 무서운 앙화가 나라에 미치게 되니 중흥의 기회를 아주 상실하고 말았다.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라고 평했다. 대원군당시 구한말의 사정에 정통했던 미국인 ‘하버트’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지배자로서의 위엄 있는 개성과 불요불굴의 의지를 소유한 한국 근대역사상에 가장 뚜렷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한국의 위대한 정치가였다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일개의 민중 선동가에 불과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오척 단구, 날카로운 눈매, 싸늘한 지모가 번득이는 듯 한 운현궁의 호랑이, 과감하고 영민한 풍운의사나이 흥선대원군이 의정부시 가능3동에 위치한 직곡산장(가능3동 사무소 뒤쪽 구 은혜유치원 자리)에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에 민비의 세력에 밀려 정계를 은퇴하고 한동안 이곳에서 칩거생활을 했다.
옛날에는 직곡산장 주위에 송림이 울창하고, 앞에 흐르는 백석천이 옥수 같이 맑고 깨끗해서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하나, 소나무도 옥수(玉水)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산장의 옛 모습과 대원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향나무가 있었으나, 산장도 향나무도 또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이곳 산장을 지나는 직동길(의정부의료원 앞길에서 가능5거리를 거쳐 송추로 가는 길)이 흥선로라 칭하고, 흥선지하도, 흥선 로터리라는 명칭이 흥선대원군을 기억하게 하고 있다.
흥선대원군은 순조 20년(1820), 서울에서 남연군 구의 4남으로 태어난, 영조의 현손이다. 이름은 하응이고, 자는 시백이며, 호는 석파인데, 둘째 아들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 대원군이 된다. 그는 불혹의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주정꾼, 노름꾼 행세를 하고 다니며, 척족 안동 김 씨로부터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고, 닥쳐 올 왕위 계승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꾸며, 아들 명복을 왕위(고종)에 올리는데 성공한다.
현성주 기자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