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산성은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 5-1’ 청성산 일대 7~9부 능성에 반달 모양의 타원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083m에 이른단. 반월산성은 주위의 산에 비하면 낮은 야산에 불과하지만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고,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고구려로서는 한반도 내륙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악해야 하는 성이었을 것이다. 동북쪽에서 성동산성을 통과하여 남하한 세력이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중랑천 주변으로 내려가야 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반월산성(半月山城)이다 반대로 한강유역에서 북쪽 철원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43번국도 주변의 평야지대를 따라 북상할 때 거쳐야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반월산성이다.
이곳에서 조금 더 북동진한다면 성돌리산성이 나오니, 성동리산성과 반월산성은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됐을 가능성이 높다. 반월산성은 예로부터 서울에서 함흥으로 오가는 관북로가 통과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이곳을 장악하면 북으로는 철원 일대, 남으로는 의정부와 남양주, 퇴계원으로 통하는 길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산성은 둘레가 약 1km에 이르고 있고, 모양이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는 반면 남북은 좁아 그 형태가 반달모양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구려의 특생인 치(雉)가 4군데나 있는 것을 보아 고구려 성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지난 1996년 단국대학교의 1차 발굴조사 때 「마홀수해공구단, 馬忽受解空口單」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1점이 산성 정상부근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포천시의 고구려시대 명칭이 마홀(馬忽)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아마 고구려시대에 축성되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포천 지역은 5세기 후반까지는 백제가, 6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가, 그 후로는 신라가 점령했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고려해 본다면 삼국이 모두 이 성을 중요한 군사적 기지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헌데 일반적인 고구려 성들보다 성돌이 큰 것은 어찌된 이유일까? 그동안 삼국시대의 성들을 살펴볼 때 두께가 얇고 길이가 좀 긴 평평한 돌을 사용했었는데, 이곳 반월산성의 성돌 들은 큰 것이 많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이 1618년 판관 이성구를 시켜 반월산성을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즉 오늘날의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리모델링한 것이다.
최상길 기자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