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를 꿈꾸던 복고와 폐쇄의 개혁정치가 ‘흥선 대원군’
<대원군과 의정부>
재기를 꿈꾸던 복고와 폐쇄의 개혁정치가 ‘흥선 대원군’
근대 개혁정치가로 실패한 개혁가로 파라만장한 생을 마친 흥선 대원군이 의정부와 인연이 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의정부를 주위 깊게 보면 이곳 저곳에 흥선 대원군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의정부시청을 바라보고 오른쪽이 의정부시 가능2, 3동이었는데 최근 흥선동으로 이름을 바꿨고, 도로명 흥선로에 그가 재집권의 꿈을 꾸며 기거했던 ‘직곡산장’을 따 상직동, 하직동 지명은 흥선 대원군과 의정부와의 인연을 말해 주고 있다.
<철종, 후사 없이 세상 떠>
1863년 12월 8일은 시대착오적 성리학사회의 재건과 왕권강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가 흥선 대원군이 역사에 등장한 날이다. 이날은 젊은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다. 철종은 후사는 없었다.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 대비하지 않았다. 이유는 왕권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이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였는데 은언군은 신유박해 때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같이 사형 당했다. 철종 입장에서 보면 당시 집권 노론은 자신의 할아버지와 형을 죽인 세력이었고 그들에 의해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이 조선의 25대 왕으로 옹립됐다. 노론은 글도 제대로 몰랐던 ‘강화도령’ 쯤은 얼마든지 요리 할 자신이 있었고, 철종이 후사 없이 죽어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대원군, 대정(大政) 위임으로 집권>
그러나 노론의 방심을 노리고 권토중래하며 준비하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다. 이하응은 조선 역사상 가장 극적인 대역전극을 만들어 낸 승부사이다. 철종이 죽자 이하응은 바삐 움직였다. 우선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조씨를 설득, 자신의 아들을 왕(고종)으로 승계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고종은 12세로 조 대비가 섭정해야 하지만 조대비는 ‘사왕이 연소하고 국사가 다난하니 흥선 대원군이 대정(大政)하라’며 조대비는 대원군에 힘을 실어주며 조대비로부터 섭정의 권한을 위임받아 집권하게 된다.
<개혁 드라이브 과감하게 실천>
집권하게 된 흥선 대원군은 재야에 머물면서 수없이 구상 했을 개혁 드라이브를 과감하게 실천하기 시작한다. 우선 군역(軍役)이었다. 부유한 양반들은 면제되었던 군역을 상민처럼 양반도 부담케 하고 양반들의 반발이 커지자 호포법(戶布法)을 강행, 양반들에게 군포(軍布)를 내게 했다.
이어 환곡(還穀)개혁이었다. 춘궁기에 먹을 것을 빌려주었다가 추수기에 갚는 조선사회의 빈민구제책이 지방관과 아전들의 중간착취가 심해지자 시스템 자체를 관영체제에서 민간체제(1866년)로 바꿔 지방 관료나 아전들이 농간 할 가능성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게 했다.
대원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서원(書院) 개혁에 나섰다. 조선 후기 서원은 당쟁과 부패의 온상이었다. 중앙파당과 연결해 지방관을 무력화 시키고, 일반백성을 수탈하는 기관으로 변질 되었다. 대원군은 철폐라는 강수를 썼다.
또 비변사 기능 약화 시켰다. 비변사는 1510년 중종5년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삼포왜란이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임시 기구였으나 1554년 명종9년 때 정규관청으로 승격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군사는 물론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을 결정하는 기구로 커졌고, 의정부나 6조는 직위만 높은 허수아비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자 비변사를 둘로 나누는 등 비변사 개혁에 칼을 뺐다.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개혁으로 백성의 지지를 받던 대원군은 복고와 폐쇄 그리고 시대착오적 성리학 사회 건설과 왕권강화가 개혁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개혁의 동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복궁 중건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왕권회복 상징으로 삼았지만 중건자금 마련을 위해 원납전,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당시 경제 질서를 심하게 왜곡시켰다. 또 통상조약 체결은 이론이 아니라 힘의 지배라는 엄중한 현실을 감안 가장 유리한 길을 선택해야하지만 성리학 사회는 정(正), 다른 사회는 사(邪)로 보는 왜곡된 세계관이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다.
재기를 꿈꾸던 복고와 폐쇄의 개혁정치가 ‘흥선 대원군’
<의정부 머물며 재기 꿈꿔>
초창기 양반사대부와 상민들의 지지를 받던 대원군은 집권 10년인 1873년 최익현의 상소로 무너지게 되었다. 그 후 양주(현재 의정부시 가능동) 직곡산장(의정부시 구 가능3동 동사무소 뒤쪽)에 칩거하면서 재집권을 꾀했으나 개혁파의 등장, 임오군란, 아관파천, 명성황후 살해 등 격변하는 시류에 마지막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회 저편으로 물러서게 되었다. 현재는 남양주시 화도면 장현리에 묻혀있다.
정리/ 현예리 객원기자
사진설명/ 흥선대원군 초상화(위), 흥선 대원군이 침거했던 의정부시 가능3동 소재 ‘직곡산장’(하) 현재는 도시화에 밀려 없어 졌고, 표시석하나 찾을 수 없다.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