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 많고 별 볼일 없는 세상에서 조선시대 엄친아로 인해 두고두고 칭송받는 길이 있다. 경기도 의정부시 용현동 379-32,31-10에 위치한 효자로(路)가 그 예이다.
이곳에 가면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을 지낸 정문부(鄭文孚 1565-1624)선생의 묘와 위패 그리고 영정을 모신 충덕사(忠德祠)가 원추형으로 잘 정돈된 소나무를 호위병 삼아 편안히 몸을 풀고 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문부 선생은 명종 20년(1565) 2월19일, 한성부 남소동(현 서울시 오장동 부근)에서 청송부사를 지내시고 예조판서에 증직된 아버지 판서공 신(愼)과 어머니 강능 김씨 사이의 2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자허(子虛)이며 호는 농포(農圃)요,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는 5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놀이를 할 때에는 언제나 대장이 되었다. 8살 때에 ‘초생달’이라는 5언시(五言詩)를 지었는데 율곡이 8살 때 지은 ‘화석정(花石亭)’과 같이 그 총명함에 칭찬이 대단하였다. 14살 때에 초시(初試)에 응시하여 시제 ‘월명화락 우황혼(月明花落 于黃昏)’으로 장원급제 하였다.
선조21년(1588) 24살 때에 과거에 응시하여 명경과에 차등(2등)으로 급제하자, 시관 김귀영과 황정욱이 우리나라의 인재를 하나 얻었다며 기뻐하였다고 전해 온다.
충의공(忠毅公)은 나라가 왜군에 짓밟히자 문신이면서도 의병을 조직, 의병으로서 혁혁한(전투내용: 기병과 내부 반도 평정, 경성전투, 길주 장평전투, 쌍포 임명전투, 길주 남문 밖 전투, 단천 전투, 백탑교 전투, 여진족 격퇴와 복속) 전과를 세우고 병조참판을 끝으로 의정부 송산에서 시부(詩賦)등을 짓고 지내다 농포집(農圃集) 5권을 남기고 60세에 운명하였다.
충의공 정문부의 생거지(生居地)는 의정부 송산(송산)이였고, 정문부 장군에게 임진왜란 평정의 공으로 선무원종 1등 공신에 봉하고, 승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5위도총부 도총관이라는 최고의 벼슬(종1품)을 추증하였으며 선생사후 43년째 1월 23일 특증 하였으며, 자손들에게도 벼슬을 주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이런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조상님을 기리는 뜻으로 후손들은 충덕사를 경기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하고 그곳 일대를 효자로라 명명하여 그 분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렇다보니 효자로 반경 2km 이내에는 정문부 장군의 음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길로 변화되기 시작 했다. 우선 충덕사를 필두로 하여 선생님들의 가르치고자 하는 열의와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맞물려 있는 어룡초등학교, 예능 및 특기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는 효자초등학교, 의정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많이 배출되는 아이보리와 분홍이 섞인 모던한 건물의 효자 중·고등학교가 건립되었다.
교육기관의 구조물이 유독 효자로 근처에 밀집된 것은 그분의 삶의 애국에 대한 열정을 칭송하면서 후세들이 닮아야할 정신의 지표가 되는 길로 삼고 싶은 뜻이 담겨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 길을 걷다보면 풍찬노숙에 시달리다 민등산이 된 공동묘지의 내 부모님 생각이 나곤해서 자식 된 도리로 심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글/ 장승희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