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컬럼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넥타이 가게 앞에서 이 넥타이 주인이 누구세요? 넥타이를 파는 분이 대답을 한다. 이 넥타이 주인은 사 가시는 분이 주인이지요! 참 명쾌한 대답을 듣고 그렇지, 넥타이 주인은 사 가신 분이 맞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주인은 누구일까? 얼마 전 30여 년 간 이곳에서 살면서 홀몸노인으로 사신 분이 하늘에 부름을 받으셨다. 장례식에서 알게 된 사실은 가난하게 사셨지만 모든 사람에게 베풀면서 즐겁게 사셨기에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아쉬워하면서 애도를 하게 되었다. 이 분은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셨기에 이 세상에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의셨다.
이 세상의 주인은 소유한 자의 것이 아니다. 미하엘 엔더의 ‘모모’라는 책에 보면 회색신사에게 저당 잡혀 사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현대인들은 많은 시간을 벌기 위하여 시간이 없는 불행한 시간을 살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수량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개인이 주어진 환경에서 느끼는 체험적인 것이다. 시간은 시계를 소유한 자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즐기는 자의 것이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톨스토이의 민화집 가운데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돈 많은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지금부터 말을 타고 가는 만큼의 땅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단 조건은 저녁 6시까지 정확하게 지금의 자리로 돌아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약속을 하고 갈 수 있을 만큼 마음껏 갔다. 그는 이제 됐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6시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땅을 더 많이 가지려는 생각만 했지 땅과 주변을 즐길 수 있는 생각은 못했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까지인지를 생각하지 않은 채 앞으로만 달려간 것이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인생이 언제 끝날지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과 마찬가지로 땅은 소유한자의 것이 아니라 즐기는 자의 것이다. 돈이든, 시간이든, 땅이든, 우리는 그것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을 가지려는 데만 맹목적으로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이 얼마만큼이든 그것을 즐기는 자가 진정으로 그것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 갤러리에 가보자 갤러리에 있는 그림은 누구의 것인가?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것인가? 갤러리의 주인의 것인가? 아니면 그 그림을 산 사람의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 아니다. 갤러리에 전시 된 그림의 주인은 그것을 즐기는 자인 것이다. 우리는 모두 욕심이 많아서 언제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돈도, 땅도, 많지 않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이미 충분한 것이며, 다만 우리는 그것을 즐기는 법을 모를 뿐이다.
좀 더 생각과 마음을 확대해서 물어보자,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이 세상의 삶을 즐기는 자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즐긴다’는 단지 쾌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소유한 신(神)을 섬기고 소유하려는 한 우리는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 노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홀몸으로 사시다가 돌아가신 지인(知人). 이분이야말로 천상병 시인의 싯귀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 말할 수 있는 삶.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글/ 서기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본지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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