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주의 기자수첩
현성주의 기자수첩
'남한의 어머니에게, 북한의 아내에게'
이산가족(離散家族)은 남북 분단 등의 사정으로 이리저리 흩어져서 서로 소식을 모르는 가족이다. 특히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헤어져 70여 년을 따로 살고 있는 수많은 이산가족의 아픔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민족만의 비극이다. 평화시대에 조금씩 접근하고 있는 요즘 이런 이산가족 문제를 먼저 풀었으면 한다.
<아, 나의 어머니>
<40년 만에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늙지 마시라/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 내 백발이 된다 해도/ 어린 날의 그 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어/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지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이 시를 쓴 북한의 오영재 (1934년~2011년) 시인은 전북 장성출신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6세의 나이로 인민군 의용군으로 입대했다. 입대 후 낙동강전투에 참전했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들이 후퇴 할 때 북한으로 갔다. 북한에서 1953년 시 ‘갱도는 깊어간다’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전개했으며, 1960년에는 평양 작가학원을 졸업했다. 1989년 3월에는 남북작가회담 예비회담 대표를 맡기도 했으며, 그해 5월 김일성 상을 수상해 계관시인이 되었다. 오영재 시인이 남녘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1990년 재미교포 한 문인이 북한 방문 중 오영재 시인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는데 이 기사를 본 남한의 동생이 재미교포 문인에게 부탁하여 아직 어머니가 남한에 생존해 있다는 편지를 북으로 보냈으며 편지를 읽은 오영재 시인이 1991년 ‘아, 나의 어머니’라는 시를 미주 지역 문예지 ‘통일예술’에 발표했다.
<북쪽 아내에게>
대체,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지?/ 낙향 할아버지한테서 사서삼경밖에 배우지 않은/ 반열 규수가/ 낯선 청년에게 시 편지를 보내오고/ 다시 집 비는 날 놀러오라고/ 두 번째 편지까지 보내오다니/ 조국해방 싸움에 생이별 36년 만에/ 슬픈 사연 많은 삶을 접고/ 차마 감아지지 않는 눈을 감았다고/ 망백 나이 허망한 세상/ 그대 높은 혼령 앞에/ 구만리 장천을 바라 터지는 가슴/ 내 뭔 말 하리오
이 시를 쓴 이기형(1917년~2013년) 시인은 민족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함남 함주에서 태어났으며 일본 니혼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한 후 1947년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하며 현실참여적인 시를 꾸준히 발표했고 1989년에는 시집 ‘지리산’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그는 북한에 아내와 딸을 두고 왔다.
글/ 현성주 기자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