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플러스/ 북한이 나포한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평화 플러스/
북한이 나포한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본고는 이재봉 교수가 '익산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참여와 자치> 83호(2018년 6월)에 발표한 내용을 발췌 요약했다.(편집자 주)
1968년 1월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될 무렵 미국에겐 온갖 악재가 겹쳐 터지고 위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앞에 소개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청와대 습격'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의 '케산(Khe Sanh)공습'이 시작됐다. 덴마크령 그린란드 (Greenland)의 미국 공군기지에서는 4개의 수소폭탄을 실은 B-52 폭격기가 추락하는 사고도 터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공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자 수소폭탄까지 터뜨리려했는지 의심이 생긴다.
미국 정부는 몹시 긴박해졌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소집했다. 외교적으로는 유엔과 우방국들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북한을 폭격하거나 봉쇄하든지 또는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논의했다. 북한이 미국 함정을 나포했으니 남한으로 하여금 소련 함정을 나포하도록 하는 게 '가장 균형 잡힌' 방안이라는 발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정보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1월 23일 나포 사건 이후 처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부터 헬름스(Richard Helms) 중앙정보국장은 나포 사건이 청와대 기습과 함께 비무장지대에서 연이어 점증하는 북한의 도발 가운데 하나라면서 베트남전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중략)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엔 두 가지 동기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에 골탕 먹이는 것이다."
그랬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증된 북한의 도발은 베트남전쟁을 겨냥한 것이었다. 1966년 10월의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자기 자신들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으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하면 우리는 지원군을 보내서 참전할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추종국보다 먼저 남한 군대를 수만 명이나 월남에 파병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66년 10월부터 비무장지대 주위에서 북한의 무장 침투 및 공격이 급증했다.
중요한 사건들을 추려보면 1967년 5월 2일 DMZ 바로 밖에 있는 미 2사단 막사를 폭파시킨 사건, 1967년 8월 28일 군정위 유엔사 전방기지 구역 안에서 작업하던 미 76공병단 막사 공격 등이다. 한편 해상에서는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한국 해군 PCE-56함이 북한측 해안포의 사격을 받고 침몰했다.(중략) 1968년 한 해는 한국 휴전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였으며, DMZ 안팎에서 181건의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가 집계한 '북한 무장침투와 공격사건' 숫자를 보면, 1950년대엔 1년 평균 2건이었다. 1960-66년엔 1년 평균 22건으로 늘었다. 그러다 1967년엔 195건으로 급증하고, 1968년엔 573건으로 엄청나게 폭증했다.
이는 김일성이 공언한대로, 그리고 미국 중앙정보국장이 분석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과 남한의 베트남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도발'을 일삼으며 청와대를 습격하려 하고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고 남한의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한 북한의 의도와 전략은 성공했다. 첫째,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이 원산 앞바다로 방향을 바꾸었다.
둘째, 남한은 1967년 7월까지 5차에 걸쳐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낸 데 이어, 1968년 3월까지 1개 사단병력을 추가로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지만, 북한의 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나포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듯 북한은 자신의 우방 베트남을 돕기 위해 전쟁을 각오하면서까지 미국에 맞섰다. 그러나 그 무렵 북한엔 핵무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남한 땅엔 수백 개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한반도 주변 해역엔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북한이 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까지 개발한 상황에서 미국과 어떻게 협상하게 될지 짐작해보기 바란다. 6월 17일 전주고백교회 '6.15선언 기념 예배'에서 강연했다. 주어진 주제는 "북미회담 이후 한반도 정세" 목사님이 날 소개하며 '예언자'로 치켜세웠다. 2년 전 미국 대선 때부터 세계 평화를 위해 클린턴보다 트럼프가 당선되는 게 좋다고 주장해온 대로 맞아떨어졌다는 거다.
여기저기서 글과 강연을 통해 수없이 주장해온 터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족집게' 소리를 좀 듣긴 했다. 보통 사람들이 덕담으로 건네는 '족집게'와 목회자가 인정해주는 '예언자'는 격이 다르기에 우쭐해졌다. 교만을 누르지 못하고 '예언'을 더 쏟아냈다. 기대 섞인 예상이다.
첫째, 7월 27일 정전협정 65주년 기념일에 판문점에서 트럼프, 김정은, 문재인이 한국전쟁 종식을 선언할 것 같다.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에 종전 선언이 빠졌다고 섭섭해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럴 것 없다. 두 나라가 '새로운 관계 설립'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문 1항과 2항엔 종전 선언의 뜻이 담겨있지 않은가.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데, 이왕 하려면 트럼프는 뛰어난 쇼맨십으로 극적 효과를 거두기 원할 것이다. 7월 판문점으로 날아오리라 예상하는 이유다.
둘째, 트럼프가 12월 10일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 같다. 김정은, 문재인과 함께 공동으로. 그가 탄핵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11월 6일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의원이 많이 뽑히는 게 좋고, 나아가 그 상을 받으면 더 안전해진다. 상을 받기 위해 북미관계를 더 진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 북한과 70년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65년간 어정쩡하게 멈추고 있는 전쟁을 완전히 끝내며, 25년간 풀지 못한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면 평화상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참고로, 2018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개인 216명과 단체 114곳이 추천되었다.
이 가운데는 나와 미국인 동료들이 추천한 '한국의 촛불시위대'가 포함돼있어도, 문재인+김정은+트럼프는 없다. 추천 마감일이 1월 31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은 3월부터 8월까지 심사하는 동안에도 후보를 추천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6월 12일 '세기적' 북미회담을 가진 데 이어 7월 27일 전쟁 종식을 선언하면, 이미 접수된 320명/곳의 후보들보다 더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셋째, 트럼프가 한미연합 군사훈련 중단에 이어 주한미군 철수나 그에 버금가는 대폭 감축을 머지않아 발표할 것 같다. 주한미군 없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할 수 있는 대책은 마련되어 있다. 중국을 겨냥해 '인도-태평양' 세력인 미국+일본+호주+인도 4각 공조를 강화한다는 백악관의 '국가안보전략 (NSS)'이다. 이와 관련해 6월 12일 북미정상회담 합의문에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내용과 일정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북한보다 미국 때문이라 생각한다.
협상이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할 수 있으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를 받으려면 미국은 그에 걸맞은 안전보장을 주어야 한다. 핵심이 평화협정과 수교인데, 여기엔 주한미군 철수나 대폭 감축이 포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회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11월 6일 중간선거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이유다. 위와 같은 세 가지 예상을 모두 맞춰 트럼프에 관해 더 영험한 '예언자'가 되고 싶다. 그가 물러나도 되돌릴 수 없는 한반도 평화체제가 구축되길 기대하면서.
글/ 이재봉 교수(원광대 평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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