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두 사람(노회찬, 최인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기자수첩/ 두 사람(노회찬, 최인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노회찬 의원과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었고
갈등의 희생양이었다”
지난 7월 23일 우리는 능력 있는 정치인 한 명과 유명한 소설가 한 명을 동시에 잃었다. 바로 국회의원 노회찬과 소설가 최인훈이다. 진보정치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노회찬(1956년 8월 31일~2018년 7월 23일) 의원은 1982년 용접 기술을 배워 노동자로 생활했으며 1989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3년 수감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다가 제17·19·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2013년 독수독과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 당했지만 2016년 20대 총선에서 창원시를 지역구로 삼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2018년 드루킹으로 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던 중 7월 23일 오전9시 38분 신당동 한 아파트에서 투신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기자수첩/ 두 사람(노회찬, 최인훈)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1936년 4월 13일~2018년 7월 23일) 작가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1950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육군 통역장교로 군복무하고 제대 후 문필활동에 전념했다. 1959년 ‘자유문학’ 10월호에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라울전〉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온 이후 1960년 〈가면고〉 〈광장〉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적 명성을 굳혔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광장>은 살아 있는 지식, 진정한 사랑은 어떠한 환경에서 가능한가라는 물음이 이데올로기적 세계관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 작품이라고 평론가들은 평하고 있다.
‘광장’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의 철학과 학생으로, 아버지의 친구 집에 얹혀살면서 학교를 다닌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 살면서 대남 방송(對南放送)에 등장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북한의 정치 활동으로 이명준은 경찰서에 불려가서 구타를 당하면서 아버지와 어떤 연락이 있었는지 조사를 당한다. 형사들은 그를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이를 계기로 그는 남한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월북을 한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한 이명준의 비판적 눈에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제도의 굳어진 공식인 명령과 복종만이 보일 뿐이며, 활기차고 정의로운 삶은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이명준은 남과 북에서 이념의 선택을 시도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허무주의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명준은 병문안 온 국립 극장 소속 무용단원인 은혜와의 사랑에서 이념의 무의미함을 다소나마 보상받지만, 그것은 개인적 삶의 한정된 행복일 뿐이고 진정한 의미의 광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군으로 그는 전쟁에 뛰어든다. 그렇지만 그는 전쟁에서도 새로운 삶을 발견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여인 은혜와 극적으로 만나지만 그녀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그는 포로가 된다. 포로 송환 과정에서 남이냐 북이냐의 선택의 갈림길을 맞게 된 이명준은 두 곳을 다 버리고 중립국을 택한다. 이제 그가 나설 광장은 남쪽과 북쪽 어느 곳에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들을 싣고 가는 인도의 상선(商船) 타고르호(號)가 남지나해를 지나 항해하는 어느 날 밤,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하면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기자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만 노회찬 의원과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을 보면 참으로 묘한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물론 한 명은 논픽션이고 또 다른 사람은 픽션이지만)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었고 갈등의 희생양이었다. 노 의원의 경우 진보의 아이콘이라 불리던 그가 ‘겨우’ 4천만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진보정치권에 큰 상처를 주었고 보수진영으로부터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버린 아픔과 갈등으로 이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광장’의 이명준 역시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이런 선택 밖에 할 수 없는 현실에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목도하면서, 70여억원의 교비 횡령 등 더 큰 죄를 짓고도 활보하는 사람이 있어 관용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지 생각하게 한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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