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 베트남 전쟁(하)/ 월남전, 한국군 최후의 용병으로 끝까지 남아
평화플러스/ 이재봉교수의 베트남 전쟁(하)
월남전, 한국군 최후의 용병으로 끝까지 남아
1967년 7월 3000명의 해병대대가 베트남으로 떠남으로써 제5차 파병이 이루어졌다. 제5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967년 8월, 존슨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아시아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베트남의 위험에 더 가까이 있는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들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1967년 9월 포터 (William Porter)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존슨의 추가 파병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비무장지대에서의 남북 충돌이나 북한의 침투활동 등 국내문제 때문에 추가 파병이 어렵지만 베트남에 1개 사단 정도 더 보낼 수 있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포터는 11월까지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 때문에 박정희와 협상하면서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압력 (any real pressure)'을 행사하기 곤란하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또한 한국이 5만 명의 파월장병을 그들의 꿈을 이루는 '요술 방망이 (Alladin's Lamp)'로 간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파병 대가로 지나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에 번디 (William Bundy) 국무부차관보는 '요술 방망이의 함정'을 피하라면서 미국이 여전히 '최대한의 추가 파병 (maximum additional ROK troop contribution)'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존슨 대통령이 바란다면서 한국의 추가 파병을 '최대한 긴급하게 (with maximum urgency)'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미국의 압력에 한국정부는 1967년 12월 '1개 소규모 사단 (one light division)'을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파병 대가로 미국이 군사 및 경제지원을 하기로 한 1966년 3월의 합의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1966년 3월 제4차 파병 협상 과정에서 브라운 대사가 약속한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한 이른바 '브라운 각서 (Brown Memorandum)'를 미국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67년 12월 호주에서 두 대통령이 만나, 미국은 한국이 원하는 구축함을 비롯한 군 장비를 늦어도 1968년 1월까지 한국에 보내기로 하고,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한 달 앞당겨 1968년 3월까지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 사태'와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장병 80여 명이 탄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초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베트남에서 이른바 '구정 (Tet) 공세'가 전개되었다.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음력설을 맞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이 100곳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하고 심지어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까지 공격한 것이다. 존슨은 1968년 2월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에 강하게 남아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원했다. 박정희는 답장을 통해 북한의 공격행위에 대해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미국 관리들은 박정희가 "나중에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apres moi le deluge)" 북한을 보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비이성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하며, 남한의 공격에 의한 전쟁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만약 한국이 베트남의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면 미국은 똑같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며 한국의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거듭 촉구했다.
그 무렵 서울을 방문한 밴스 (Cyrus Vance) 국방부차관은 박정희를 만나 한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하기만' 해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 존슨에게 박정희가 과음을 하고 부인과 측근들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등 나라 전체를 통제하며 일방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다. 1968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는 미국이 한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해주면 2개 사단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68년 4월 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암살되면서 미국 주요도시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가 거세게 전개되었다. 1965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반전운동이 1968년 1월의 '구정 공세'와 4월의 킹 암살로 격렬해진 것이다.
이 무렵 존슨은 북베트남 폭격을 멈추고 휴전을 추진하는 한편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68년 4월 중순 박정희를 만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존슨의 휴전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그의 대선 불출마 발표에 영향 받아 소극적으로 응했다. 추가 파병을 당장 하기는 어렵고 나중에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미국 중앙정보국 (CIA)은 박정희가 존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1개 사단을 기꺼이 추가 파병하려고 했지만, 존슨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고 생각한 데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 확대를 꺼려하자, 추가 파병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
1968년 6월엔 한국이 5,000명의 제대 병력을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미국은 이미 5월부터 북베트남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을 시작한 터였다.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닉슨 (Richard Nixon)이 이기고 1969년 1월 취임하여 7월 이른바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미군들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도 베트남의 한국군은 그대로 유지되길 원했다. 박정희 역시 미국이 원하면 한국군을 베트남에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한국군들 수당이 한국에서의 봉급보다 10배 이상 많으니 한국이 철수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한국 정부는 1971년부터 국내 여론과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라 한국군 철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은 1971년 주한미군 6만 3000명 가운데 2만 명을 철수한 데 이어 추가로 감축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하고 한국군 현대화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달래기도 하며 한국군 철수를 반대했다.
이에 한국은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진 뒤에야 병력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미군 전투 병력이 거의 떠난 1972년 여름부터 1973년 3월까지 5만 명 안팎의 한국군 2개 전투사단이 베트남전장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병력을 보냈고 미국이 전쟁을 끝낸 뒤에 군대를 철수시켰으니 미국의 침략전쟁에 가장 충성스러운 앞잡이였고 성실한 실행자였다. 용병으로.
이재봉 교수(원광대 평화학과)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