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목사의 '현대인의 죽음과 구원'
현대인의 죽음과 구원
죽음은 한 개별 생명체에게 있어 모든 것의 끝이다. 죽음하면 보통 우리는 이러한 생물학적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개별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생명체의 끝으로서의 죽음 그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다. 개인은 자신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탄생도 경험할 수 없다. 탄생과 죽음은 개별 생명체가 경험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만약 개인이 탄생과 죽음을 경험하려면 몸을 떠나 존재하면서 나의 몸이 탄생하거나 죽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주체는 우리 몸의 경험의 한계 내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상 경험하는 죽음경험은 단절로서의 경험이다. 살아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주위 사물과 타인과의 단절을 뜻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산다면, 그는 이미 주변 사물과 교섭하거나 타인과의 관계를 단절한 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만의 단 하나의 사물과 단 하나의 생각으로 살아간다. 타인과 더불어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없다. 살아있는 동안 살아있는 생명체가 겪는 죽음이란 이렇게 외부와의 단절로서의 죽음이다. 보통 우리는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소외 및 단절 속에서 살아가는 한, 매순간 죽음을 경험하고 살아간다.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 이반일리치가 경험하는 죽음이 바로 이러한 단절로서의 죽음이다. 그는 생물학적 죽음의 표식 즉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러한 죽음을 경험하다가, 마지막으로 단한번의 생물학적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그는 정작 자신에게 다가온 생물학적 죽음 이전에 여러 번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타인들이 자신을 멀리하면서부터 오는 단절로서의 죽음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자신의 죽음 사실을 알게 된 가족과 주변 인물들에게서 그리고 회사의 동료 직원 및 그와 연결된 타인에 의해서 순차적으로 경험된다. 이들은 이반일리치가 죽고 난 이후 그가 가지고 있던 위치에 관심을 가진다. 누가 그 자리로 승진하며, 다른 사람이 그 자리로 올라가게 되면, 그 자리는 누가 채울 것인가?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남편 혹은 아버지가 죽고 나면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이반일리치는 스스로 자신만의 고독한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생물학적 몸을 매개로 타인과 접촉하기 보다는, 사회적 연결망(SNS)으로 타인과 접속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반일리치와는 다른 죽음을 경험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SNS에 연결되어 있는 연결망(network)이 사라지면, 단절을 경험하게 되고, 소외를 경험한다.
이러한 온라인상의 주체로 살아가기 이전에 사람들은 오프라인 상의 생물학적 주체로 살았다. 그런데 대체로 오프라인 상의 주체와의 만남에서 단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도피처로 발견한 곳이 온라인이다. 여기서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보고 보이고 듣고 들리는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얼굴을 숨기면서 자신의 새로운 자아로 무장한 존재로 떠돌아다닐 수 있다. 다중인격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죽음이 경험된다. 이 새로운 죽음은 바로 온라인에 존재하는 타인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타인과의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죽음이다. 인간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이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한다는 뜻인데, 만약 이러한 타인과의 소통 창구가 없다면, 사회적으로는 이미 인간의 삶을 살지 않고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도처에서 사회적 연결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 없이 살아가는 것을 불안해한다. 살아가는 장소가 여행지이든, 카페이든, 전철이든 길이든 상관없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죽음은 통신망 단절에서 오는 불안으로서의 죽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나중에 ‘사회적 동물’로 번역되기도 했지만, 이 말은 인간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고 들을 수 있다는 것, 즉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한다.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은 아니다. 개미와 꿀벌 등도 사회적으로 살아간다.
개미와 꿀벌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사회적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서로 봄/보임의 관계 가운데서 자유롭게 이야기 하며 살아가는 데 있지 않을까? 타인과 소통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것, 타인과 소통할 기회가 없이 매일 정신없이 기계처럼 살아가는 것, 타인과 공감하거나 타인과의 연대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타인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과 같다.
고대 및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은 신앙을 통해 자신만의 집착과 교만에서 벗어나 어떻게 신과 소통하는가에 달려 있었지만, 현대인들에게 구원은 나르시시즘을 넘어 어떻게 타인을 환대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길을 여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서기원(의정부 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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