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산을 통해 본 ‘김정일 위원장의 개혁, 개방 성향’(1)
관산을 통해 본 ‘김정일 위원장의 개혁, 개방 성향’(1)
좀 오래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2004년 7월 21일, 국회의원회관 1층 소회의실에서 통일문화재단(대표 현성주) 주최로 관산 선생(중국인)을 초대, 통일논단을 개최했다. 제목은 ‘김정일과 양빈’의 저자 관산선생 초청강연회로 ‘신의주특구(압록강 하구 섬)와 양빈을 통해 본 김정일 위원장의 개혁 개방성향에 대해 알고자 관산을 한국에 초대했다. 본지는 이때 이야기 되어졌던 김정일의 개혁, 개방에 대한 생각을 통해, 김정은 체제 속의 남북교류와 협력의 지혜를 얻고자 4회에 걸쳐 연재하고자 한다.
<관산은 누구인가?>
우선 오늘의 초대자인 관산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김정일과 양빈(원제 不辛的盜火者一㧋所知道的楊斌)’의 책을 펴낸 저자로 양빈이 초청한 전기 작가다. 그러나 꼭 작가이기보다는 양빈 대표단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했다. 즉 이중 신분으로, 양빈을 대동해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김정일을 두 차례 만났으며, 신의주 특구설립을 둘러싸고 극비에 추진된 ‘신의주 특구 기본법’ 제정에도 관여했고, 4차례 회담 등 전반 과정의 목격자, 기록자, 참여자로 ‘김정일과 양빈’의 책을 통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비밀을 처음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관산은 양빈 전기 작가로 신의주 특구설립 전후의 7개월 간 늘 양빈과 함께 있었고, 평양방문을 비롯해 북한과의 회담에 직접 참여한 사람으로서, 신의주 특구설립의 신비한 베일을 벗기는 동시에 김정일과 북한정책 변화에 대한 진실을 실감 있게 말할 수 있는 중국인 작가이다. 관산은 ‘북한의 개혁 개방만이 한반도 평화와 발전의 길이다’라는 점을 ‘김정일과 양빈’의 서문에서 명확히 밝혔다. 그는 남북한은 형제이자 하나의 민족이며, 남북한 문제는 어디까지나 당사자인 남과 북이 해결해야 하며, 현 상황에서 남한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대화를 통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는 길만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신의주 특구설립에 참여한 체험을 통해 김정일은 국제사회에 융합되기를 원하며, 개혁개방을 원하며, 남한이 북한을 지원하기를 원하며, 북과 남이 대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자는 생각이라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한 정책은 현명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관산은 신의주 특구 전반 과정에 참여한 중국인으로서 김정일과 북한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는 자신이 북한에서 직접 겪고 직접보고 들은 견문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우리가 김정일과 북한을 인식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의주특구건립의 의의>
북한은 왜 신의주특구를 건립 해야만 했는가? 이는 북한의 경제정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북한은 1995년부터 수년간 계속된 자연재해를 입음으로서 농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95년에 발생한 홍수로 북한은 식량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였으며, 이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150억 달러를 육박했다. 1996년 여름, 북한에 연이어 퍼부은 폭우는 최고 강우량이 무려 730밀리미터에 달했고, 그해 식량은 전국 필요량의 절반인 250만 톤 밖에 생산되지 못했다. 96년 말, 북한의 국고에 비축된 재고량은 24.6만 톤으로 전 국민의 한 달 식량분에 불과했다.
1997년 북한은 또다시 60여년 만에 처음 찾아온 가뭄으로 인해 곡물의 주요 생산지역인 서부연해지역의 수확물을 거의 거둘 수 없게 되었다. 1년에 단 한 번 모종하는 북한으로서는 일단 농업재해를 입자 2,200만 인구의 심각한 식량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급기여는 굶어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북한은 할 수 없이 국제관례에 따라 국제사회에 원조를 요청했으나 국제기구의 지원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다. 북한은 서방국가로부터 장기적인 봉쇄와 경제 제재를 입음으로써 여전히 심각한 식량부족현상을 보였다. 또한 석유, 전력, 석탄 등의 에너지원 결핍으로 제조업과 교통의 마비로 경제적 어려움이 갈수록 커졌다.
<최악의 경제에 직면한 김정일>
내우외환에 직면한 김정일은 북한이 이러한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했다. 그는 북한의 각 지역을 두루 다니며 군대를 시찰하고 광산지역이나 농촌을 탐방하여 그들의 실제상황을 조사하는 등 민심을 돌봐 생산회복을 다졌다.
그는 대규모의 군부대를 동원하여 제1 선에 배치해 가장 형편이 어려운 곳의 건설을 추진했고, 어려움과 맞서 투쟁한다는 “강계정신(江界精神)”의 기치를 널리 선전하여 “자력갱생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로 인민을 격려했다. 북한 인민들은 전력을 다해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개인 소유의 땅을 넓히고 그들로 하여금 야채를 재배하고, 돼지, 닭, 오리, 토끼, 등의 가축을 사육하게 하여 “식량을 보충”하도록 했다. 또 북한군대의 병영에서도 돼지나 닭, 토끼 등 야채를 키우게 하여 북한국민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했다. 6년 동안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경제는 “가장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경제형세가 뚜렷이 달라졌고, 이로 인하여 인민의 생활이 개선되었다” 북한의 이 시기는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은 바 있는 중국의 6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
최근 몇 년간 북한의 형세는 특히 외교부문에 있어서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김정일은 중국과 러시아 배경을 뒤에 업고 많은 국가와 국교를 맺거나 관계 회복에 착수했다. 2002년 9월25일, 영국은 평양 주재 대사관의 책임자를 대리대사에서 대사로 격상했다. 또 10월3일 북한과 미국은 평화적인 대화를 시작으로, 10월에는 일본과 관계 정상화의 협상을 회복하여 양국관계는 완화되기 시작했다. 오부치 수상은 차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회담을 가졌다.
<‘현물배급체제’를 폐지>
회담에서 북한은 미국, 일본, 한국을 포함한 각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하여 한반도 긴장국면의 완화와 경제발전을 희망했으며 최근에는 다시 6자회담을 시작하여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은2002년7월, 제한적인 개혁을 시작하였다. 한 예로 북한은 ‘현물배급체제’를 폐지하고 자유시장판매로 바꾸었으며 ‘화폐배급체제’를 개혁하여 활발한 무역시장을 선보였다.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가판 매점과 비슷한 구멍가게가 평양에도 생겨났고, 감자볶음, 찰떡, 과일, 아이스크림 등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보았다. 평양의 양강도 호텔부근에는 한 야채 시장이 있다.
그곳은 농민시장으로 감자, 가지, 나팔꽃나물, 배추, 당근, 고구마 등 매우 다양한 종류의 야채가 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신의주특구의 건립은 북한의 대외개방정책의 일부분이다. 어떤 학자는 “북한은 내외부적인 환경 변화에 따라 대외개방은 더욱 확대되고 경제, 사회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북아지역경제 변화에도 역량을 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그 외의 많은 학자들도 북한이 이미 전 세계에 알린 신의주와 북한의 개혁 개방은 퇴로가 없으며 앞으로 계속 진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리 현성주 기자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