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논설위원의 '백성과 시민'
서기원 논설위원의 '백성과 시민'
백성과 시민은 다르다. 백성이 중세 시대의 이름이라면, 시민은 근대 시대 이후의 이름이다. 백성이 중세 시대에 왕의 명령에 따라 복종하는 신하에 해당한다면, 시민은 근대 시대 이후 정치 지도자와 약속하는 정치 경제적 주권자이다. 백성의 왕에 대한 관계는 명령과 복종이고, 충성이고 의리라면, 시민의 정치 지도자와의 관계는 계약이고, 합리적인 합의 과정이고 상호 신뢰이다. 지금 2017년 현재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백성이 아니라, 시민이다. 1948년 이후, 우리나라는 서양의 시민법에 기초해 만들어진 민주주의 국가다. 이 때 이후 우리는 조선 시대의 백성의 삶을 마감하고 시민의 삶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도가 바뀌었다고 해서 백성이 갑자기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제도에 맞게 시민의 자격과 자질이 교육되어야 하고, 정치 지도자 또한 과거의 왕과는 다른 질서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한다. 1948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교육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여전히 백성의 삶의 질서와 가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문제들이 객관적이고 합법적 법질서에 의해서 작동되기 보다는 특정한 종족이나 이익 집단에 의해 움직여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과 가깝다는 사람과의 ‘우연’을 가까운 사람이 함께 취할 이익의 ‘필연’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해마다 선거철이 되면, 유명한 맛 집에 줄서 있는 사람들처럼 자신이 가진 사람과의 우연을 매개로 하여 자신이 취할 이익의 ‘필연’을 창출하기 위해 줄 서기 하는 풍경을 볼 수가 있다.
세상의 인심이니 의리니 충성이니 하는 개념들은 시민을 단위로 해서 움직이는 현대 시민의 도덕적 가치가 더 이상 아니다. 오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면서 약속과 신뢰를 바탕으로 살아간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고 그에 맞추어 적절하게 행동하는 기업은 이익을 얻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손해를 보게 된다.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너무 비싸면 구매하지 않고, 적당하다고 생각하면 사기도 한다. 혹은 그 반대로 어떤 물건이 비싸기 때문에 살 수도 있다. 이 과정에는 기업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이미지도 한 몫 한다. 정말 특정 기업의 물건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 기업이 가진 신뢰가 높아서 사람들이 물건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질서 속에는 과거 백성이던 시절 주인과 종의 관계가 설 자리가 없다. 모든 것이 약속과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는 시민이 이제 더 이상 왕의 시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왕이 시민의 시혜로 살고 있는 시대이다. 예전에는 백성의 의무만이 강요되었지만, 이제는 시민의 의무와 더불어 정치 지도자의 의무도 강요된다. 그런데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예전의 왕처럼 행세한다. 자신을 명령의 주체로 인식하고, 시민을 백성으로 생각한다.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들의 의무만을 강요한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여전이 왕과 공주의 시대 가운데 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 마디로, 시대착오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 시대가 지나도 한 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중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기업들에게도 복종하라고 소리친다.
기업들은 어떠한가? 기업이 이득을 얻는 것은 순전히 소비자 덕분이다. 소비자가 없었으면 기업은 성장할 수가 없다. 아무리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와도 기본적으로 내수시장을 발판으로 성장하는 기업들은 소비자들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오로지 돈만을 벌겠다는 천민자본주의적 발상으로는 제대로 기업을 이끌어 갈 수가 없다. 많이 돈을 벌은 만큼 소비자에게 베풀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오늘날 기업은 정부는 소비자들에게 복종하라고 소리친다. 이것이 이른바 ‘갑질 횡포’이다. 야당은 어떠한가? 이들은 지난 4년간의 실정에 적극적으로 비판의 소리를 내어 잘못된 정치를 바꾸려고 하지 않고, 숨죽이며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들다가, 최근에 일어난 광장 민주주의의 바람을 타고 편승하려고 하고 있다. 탄핵 정국의 파도 속에서 자신의 반사이익만을 노리고 있다.
이들의 관심은 시민의 이익이나 시민적 질서에 있지 않다. 벌써부터 야당은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백성’들을 위해 다 해 줄 것 같은 구세주가 되려 하고 있다. 최근에 일어난 ‘촛불 혁명’의 목적과 의미는 정권교체에 있지 않다.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모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모든 분야에 적폐를 없애는 데 있다. 시민들도 마찬가지다. 시민이 되려면 눈을 똑바로 뜨고 내가 내는 세금이 바로 쓰이는지 감시해야 한다. 시민의 과제는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백성의 흔적’을 지우는데 있다. 만약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에 몰두하면서 이러한 ‘시민의 가치 회복’이 아니라, 새로운 ‘구세주(왕)’만을 기다린다면, 또 다시 백성으로 전락할 것이다. 글/ 서 기 원(의정부 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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