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 일, 중 정상회의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별도의 회담을 가졌다
평화 플러스/ 한, 일 분쟁
최근 윤석열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 일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에 2020년 프레시안에 기고한 이재봉 교수(원광대 명예교수)의 ‘한반도를 둘러싼 5가지 위기’ 중 네 번째 챕터인 ‘한, 일 분쟁 확산’을 발췌 소개하면서, 바람직한 한, 일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주)
문재인 정부가 '촛불 민심'을 바탕으로, 그리고 2017년 대선공약에 따라 한국과 일본 사이에 2015년 맺어진 '위안부' 협정을 2018년 사실상 파기했다. 대법원은 일제에 징용된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2018년 판결했다. 아베 총리는 2019년 6월 오사카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과만 정상회담을 하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7월부터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과 함께 한국에 수출규제를 비롯한 경제보복을 시작했다. 한국은 민간 차원에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전개하고, 정부 차원에선 일본과의 군사정보 교류협정 (GSOMIA)을 끝내겠다고 맞섰다. 한, 일 갈등이 역사문제와 영토문제에서 경제문제와 군사문제로까지 확산된 것이다.
미국의 중재와 압력으로,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미루고 일본은 수출규제를 완화하는 등 2019년 12월 현재 한일 간의 마찰이 일시적으로 잠복하는 듯하지만, 갈등과 분쟁은 언제든 다시 불거지고 오랫동안 해소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 배경과 과정을 짚어본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냉전이 심화하자 미국은 일본과 1951년 안보 조약을 맺었다. 1941~45년 일본과 전쟁을 벌일 때는 소련과 연합했지만,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치르면서는 일본과 손잡게 된 것이다. 미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한국까지 끌어들이려 했지만, 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지 겨우 6년이 지난 때여서 일본과의 적대관계를 풀기 어려웠다. 미국이 1951년부터 한, 일협상을 주선하고 개입하며 압력을 행사했지만 이승만의 완고한 반일정책에 막혔다.
이승만 대통령이 1960년 사월혁명으로 쫓겨나고 일본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이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미국은 1962년부터 한,일협정을 ‘미국정부의 최고 관심사’ 또는 ‘가장 급선무’로 삼고 한국과 일본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협상에 적극 응했지만 야당과 대학생들의 저항과 반발이 몹시 컸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65년 타결된 한,일협정은 야당과 대학생들의 주장대로 몹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이며 졸속적’인 것이었다.
첫째, 일본이 35년간의 식민 통치에 대한 사과나 배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한국에 유상과 무상채권을 포함해 모두 8억 달러를 건넸는데, 식민통치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독립 축하' 및 '경제 협력' 명목이었다. 아직도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고 주장하는 한국의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이 적지 않은데, 당시 일본 정치인들이야 오죽했겠는가.
둘째, 독도 영유권, 징용자, 위안부, 원폭 피해자, 약탈 문화재 등에 관한 문제를 모두 덮어버렸다. 독도 문제가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징용자와 위안부 문제 등이 최근 다시 불거지게 된 배경이다.
한, 일협정이 맺어진 1965년 이후 50년이 흐른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아베 정부와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위안부 협정을 맺었다. 1965년 한,일협정에서처럼 일본의 사과는 전혀 없었고, 일본이 10억 엔 (약 100억 원)을 건네기로 했는데, 배상이나 보상 명목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 명목이었다. 나중에 문제가 될까 봐 위안부 문제를 마지막으로 그리고 되돌릴 수 없이 해결한다고 선언하고, 앞으로 유엔이나 국제사회에서 이를 빌미로 비난이나 비판을 자제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반세기가 흐른 뒤에 이렇게 또다시 ‘민족 반역적이고 굴욕적이며 졸속적’인 한,일협정이 되풀이된 것은 여전히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급속도로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해서다. 미국이 2015년 일본과 방위협력지침을 다시 개정하고 2016년 일본 안보법제를 개정하도록 이끌며 미일 동맹을 강화하자, 중국은 러시아와 손잡고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는 등 군사협력을 강화했다.
이런 배경과 과정에서 미국은 다시 한국+미국+일본의 삼각공조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에 압력을 행사했다.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 껄끄러운 문제를 털어버리고 일본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는 데 적극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크게 세 가지가 추진되었다.
첫째, 앞에서 얘기한 대로 2015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위안부 협정이 맺어졌다. 둘째, 2016년 미국과 한국이 고고도 미사일방어망(THAAD) 배치를 발표했다. 겉으로는 북한을 겨냥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국을 봉쇄하기 위해서다. 셋째, 2016년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모두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참고로,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후보 시절, “위안부 피해자들이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이끌어 내겠다고 공약했다. 군사정보보호협정의 효용성을 검토하고 연장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도 대선 공약에 포함했다.
그런데 아베가 경제보복을 시작한 데는 위안부와 징용 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불만과 분노 섞인 도발엔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증오뿐만 아니라 중국에게 추월당한 충격과 좌절, 한국에게도 추격당할지 모를 불안과 경계, 그리고 북한 및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소외당하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곁들여져 있지 않을까.
일본은 1970년대부터 독일을 제치고 세계 제2의 경제 대국 지위를 지켜오다 2010년 중국에 추월당했다. 1945년까지 일본에 짓밟혔던 중국이 1964년 핵무기 보유국이 되고, 1971년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까지 된 터에, 경제적으로도 국내총생산과 무역 규모에서 일본을 앞질러버린 것이다. 핵무기도 갖지 못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꿈도 이루지 못해 군사력으로나 외교력으로 중국에 밀리던 일본이 경제력에서도 뒤지게 되면서 얼마나 크게 충격 받고 좌절했겠는가.
한국에도 쫓기는 상황이다. 1965년 한,일수교 당시 한국경제는 일본의 30분의 1 또는 3% 수준이었지만, 50여 년이 흐른 2018년엔 3분의 1 또는 30% 수준이 되었다.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2.5배 정도 많기에, 1인당 GDP는 거의 맞먹는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90년까지 일본의 40% 이하였지만, 2015년엔 90%였고, 2020년엔 95%, 2025년엔 100%로 따라 잡으리라 전망된다.
과거엔 한국에서나 세계에서나 일본의 소니와 파나소닉이 전자제품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한국의 삼성과 LG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쫓기는 미국이 추월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듯, '흔들리는 일본'이 의존국에서 경쟁국으로 성장한 한국을 경계하기 위해 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덧붙여 2018년 4월 남, 북 정상회담으로 시작된 한반도 대전환 시대에 남북한 및 주변 4강 대국 중에서 일본만 소외되었다. 북한을 중심으로 다양하고 활발하게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김정은은 문재인과 3회, 트럼프와 3회, 시진핑과 4회, 푸틴과 1회 만났다. 아베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아베의 요구에도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다.
나아가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한반도가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까운 중국 대륙과 연결될 텐데, 그러면 섬나라 일본은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다. 아베가 한미합동 군사훈련 중단을 비난하며 남북관계 진전을 방해하는 배경이리라.
일본은 남북관계뿐만 아니라 한,중관계 진전에도 훼방 놓을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 반한 또는 혐한 감정을 이용해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한국을 경계하고 견제할 텐데,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나 민간 차원에서나 다양한 대책을 슬기롭게 마련하는 게 바람직하다.
글/ 이재봉(원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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