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주의 '블랙리스트'
현성주 기자수첩 '블랙리스트'
요즘 우리나라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블랙리스트blacklist다. 서양에서의 유래는 잉글랜드 국왕 찰스2세(1630~1685)가 즉위 할 때 아버지 찰스 1세를 죄인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한 정적들의 이름을 모아둔 것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말로 의미를 풀이하면 ‘살생부(殺生簿)’라고 할 수 있다.
즉 특별히 주의하고 감시할 필요가 있는 인물의 명단으로 주로 불법적인 행위와 관계된 것을 이른다. 대체로 수사 기관 등에서 이런 사람들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마련하고 있다. 말 그대로 살생부는 제거하거나 살릴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명부라고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의 살생부에 관한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역사적 살생부는 15세기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킨 한명회의 살생부 일 것이다.
당시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걸림돌이 될 인물과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을 가려 죽일 자와 살려둘 자를 구분한 살생부를 작성해 수양대군에게 바쳤다. 수양대군은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가 영의정 황보인 등과 모의해 안평대군(수양의 동생)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북방 육진을 개척해 대호(大虎)라는 별명으로 여진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김종서를 철퇴로 참살했다. 이어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대신들을 궁궐로 불러들인 후 차례로 제거했다. 하지만 신숙주 등 생부(生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승승장구했다.
이런 블랙리스트 이던 살생부 이던 공식적일 수도, 비공식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런 블랙리스트가 정치적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검찰에서 비밀리에 조합 간부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감시를 한 사실이 밝혀져 문제가 된 것 등이다. 요즘 블랙리스트라는 단어가 우리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누가 보아도 다분히 정치적인 요소가 뚜렷하다. 즉 최고 통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작품을 만든 예술가와 단체는 모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심지어 화랑이나 극단조차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 졌으며 체육계에도 블랙리스트가 있었다고 한다. 한 예로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을 돕기 위해서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이 블랙리스트에 근거해서 유명 작가의 해외 진출을 거꾸로 막았다는 증언도 나왔다.
물론 통치자가 시켜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인사들이 "순수 문화예술 쪽에서도 반정부적인, 반정부적인 행동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왜 지원을 하느냐? 왜 제재를 하지 않느냐?“는 식으로 알아서 여론을 몰아가면 이 땅의 예술가들은 어떤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을까? 지금 한류라는 우리 문화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정부가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작품에 대한 검열이 없어진 후 한류는 부흥하고 널리 퍼진 것이다. 이와 반대로 화이트리스트는 허용되거나 권한이 있는, 식별된 실체들을 모아놓은 목록이다. 제발 검든 희든 이런 리스트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얼마 전 이 같은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한 전직 대통령 비서실장과 현역 장관이 구속된 ‘꼬라지’를 우리 국민들은 지켜보았다. 참담한 마음이다. 21세기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당연히 선진국이라 여기고 있는 지금에 와서 이따위 블랙리스트나 살생부를 만드는 정치 행태는 없어져야하며 또 이런 것을 만든 사람은 당연히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참된 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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