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국 박사의 '동양의 평화사상'
동양의 평화사상
‘평화’라는 용어는 원래 ‘平(평)’ 자와 ‘和(화)’ 자의 합성어다. 중국 고대문헌 가운데 하나인 ‘춘추좌전’에서 ‘平’ 자는 전쟁 등으로 빚어진 국가와 국가, 공실(公室)과 공실 사이의 원한, 증오 등으로 얽힌 불화 관계를 해소하고 우호관계를 되살린다는 뜻으로 많이 쓰였다. 그리고 ‘和’ 자는 갖가지 사물, 사건들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씌어졌다.
오늘날 중국에서 화평(和平)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평화라는 단어는 좁은 의미로는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사람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 그리고 자연의 모든 사물, 사건들이 평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뜻한다. 즉 어느 하나의 사물 또는 주장이 획일적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물들의 발전을 저해할 수 있으나 다양한 사물 또는 주장이 상반(相反), 상성(相成)하여 조화를 이루면 사물들은 각기 그들의 성능(性能)을 발휘하여 생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약 기원전 6세기경에 이미 다양성의 조화를 높이 평가하는 평화사상이 제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고대인 춘추시대(BC770~476년)부터 봉건제후국들 사이의 강렬한 전쟁을 한 전국시대(BC.477~222년)에 이르는 동안 많은 사상가들, 즉 제자백가가 출현하여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墨子와 추종자의 무리) 그리고 도가(道家)들이 각각 추구한 이상주의적인 길이 있는가 하면 법가(法家), 병가(兵家)들이 각각 제시한 현실주의적 방안이 있었다.
다시 말해, 평화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각기 다른 견해를 제출한 것이다. 도가를 제외한 제자백가들은 이상주의자건 현실주의자건 막론하고 모두 천하의 통일을 평화의 목표로 삼았다. 그 이상적 모델을 유가는 역시 혈연적 종법질서(宗法秩序)를 존중하는 예치(預置), 덕치(德治)에서 찾았고, 묵가는 이와 달리 종법에 반대하는 상현(尙賢), 상동(相同)에서 모색하였으며 법치(法治)를 선호하였고 도가는 통일이 아닌 개체, 대국(大國)이 아닌 소국(小國)을 택하여 무위지치(無爲之治)를 강조하였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유가는 UN과 비슷한 도덕적인 권위를 갖는 기구를, 묵가는 종교적 권위를 갖는 통치기구를, 법가는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강한 세계정부를, 그리고 도가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구도를 제각기 그리면서 평화문제를 접근해 갔던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은 모두 사랑을 바탕으로 영원한 평화를 희구하였으며 현실주의자들은 각국의 실질적 이해를 중심으로 통일을 염원하였다. 전쟁은 인간의 본성문제까지 심각하게 묻는 데까지 발전하여 중국철학에서는 인성론(人性論)이 그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하였다.
<공맹(孔孟, 공자와 맹자)의 평화관>
공자가 생각한 평화사상의 원형은 주공(周公)의 제례작악(制禮作噩)의 정신이었다. 그는 례(禮)에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부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인(仁)이었다. 그는 알맹이 없는 禮, 다시 말하면 사랑이 없는 규범(禮)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仁은 남을 사랑하는 것(愛人)과 ‘자기를 누르고 사회규범(禮)을 회복하는 것’이 그 실제 내용이었다. 그는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는 정명론(定命論)을 펼친다. 공자는 이와 같이 명(名)과 실(實)이 서로 부합되지 않을 때 혼란이 생겨나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전쟁까지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공자의仁사상은 맹자의 인정(仁政),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념으로 계승되었고 또 송명대(松明代)에는 만물일체설(萬物一體說)에로 확대되어 인간 사이의 평화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 사이에서도 일체감을 이루는 적극적인 평화사상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공자의 정명론(定命論)은 맹자의 방벌론(放伐論)으로 이어져 왕도정치에 위배되는 폭군을 합리적으로 제거하는 명분을 만듦으로서 평화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공자가 ‘지(知)’를 중시한 것은 항구적인 균형(中)과 조화(知) 속에 영속적인 평화가 깃들고 있음을 내다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맹자(BC. 372~289년)의 평화사상은 공자를 계승하였으나 그 구체적인 방법의 제시에서 더욱 뚜렷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전국시대에서 ‘천하가 바야흐로 합종연횡(合縱連橫)에 힘써서 공격과 정벌을 현명하게 생각하는’ 풍토 속에서 전쟁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는 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맹자는 도가의 선구자인 양주(楊朱)의 위아주의적(爲我主義的; 개인주의적) 평화방식, 사회주의에 가까운 묵자의 겸애주의적(兼愛主義的) 평화방식 모두를 찬성하지 않았다. 맹자가 그들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자신의 평화이면인 인정(仁政)과 왕도정치에 정면으로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맹자는 정쟁을 반대하였지만 ‘위(上)가 아래(下)를 치는 정벌’은 인정하였다. 천자가 제후나 경대부의 반란을 제압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정벌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제후 또는 경대부를 응징하는 것이므로 의로운 것인데, 춘추시대에는 각국 간의 전쟁만 있었을 뿐 의로운전쟁(Just War)이 없다고 하였다. 맹자가 이상적 모델로 삼았던 천자는 요순(堯舜) 또는 문왕(文王) 같은 성군(聖君)이며 그들이 통치했던 시절은 바로 태평성세, 즉 지극히 평화로운 시대였다.
맹자는 평화의 구현방법을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즉 인심(仁心)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인정(仁政)으로써 하지 않으면 천하의 평화를 가져올 수가 없다고 하였다. 仁政이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왕도정치이다. 맹자는 이것을 패도정치(覇道政治)와 구분하였다. 그는 ‘인자무적(仁者無敵)’을 강조하고, 왕도(王道), 인정(仁政)만이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했다.
<순자(荀子)의 평화관>
순자(BC. 약298~238년)의 평화사상은 그의 예론(禮論)에서 잘 드러난다. 예는 다툼과 혼란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평화롭고 질서 있게 사는 길을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같은 물건을 갖고 싶어 하고, 또 싫어하기도 한다. 욕구는 많고 물건은 적다. 적기 때문에 반드시 투쟁이 생긴다’고 말했다. 인간이 혼자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사회를 이루어 살아야 하는데 서로 다투지 않고 함께 공존하려면, 최소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상태에서 만인에게 제한이 부과되어야 한다.
예(禮)의 기능은 바로 이 한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禮가 존재할 때 평화가 존재하는 것이다. 순자의 평화관은 이처럼 禮에 근본을 두고 법가와 병가를 비판하는 입장에 있다. 순자에 의하면 법가 또는 병가에서 주장하듯 우수한 무기, 높고 싶은 성곽과 연못, 엄한 형벌의 위력 등은 국가의 통치와 천하의 평화를 위한 방법으로 부족하고 오직 ‘예(禮)’ 가 국가를 다스리는 최고 원칙이며 국가를 강성하고 견고하게 하는 근본이며 천하에 위력을 떨치는 길이고 공덕과 명예를 세우는 총체라고 하였으며, ‘禮’에 따라서 일을 행하면 청하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지만 예를 따르지 못하면 국가조차 멸망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 김승국(평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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