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늦둥이 '덕혜옹주'
고종의 늦둥이 '덕혜옹주'
13세의 덕혜웅주 모습(위)과 37년만에 귀국 모습(아래)
고종이 환갑 때 얻은 늦둥이 딸,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
덕혜옹주 대한제국의 마지막 옹주로 태어난 그녀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대한민국에서도 버림받은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요즘 영화 ‘덕혜옹주’가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오늘은 영화 이야기가 아닌 역사 속 덕혜옹주를 만나려고 한다.
황제와 옹주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2년 5월 25일 고종이 거처하던 덕수궁에 “응애 응애” 여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로 조선의 마지막 옹주 덕혜(1912~1989)가 태어났다. 고종이 환갑에 얻은 늦둥이 딸이었다. 어머니는 궁정의 부엌일을 맡아보던 소주방(燒廚房) 소속의 복녕당 귀인 양씨(福寧堂 貴人 楊氏,1882년-1929년)였다. 그녀의 이름은 양춘기. 나이 서른에 옹주를 낳은 것이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오후 7시 55분에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탄생하였다. 8시 20분에 태왕 전하가 복녕당에 납시었다.”고 하여 덕혜옹주의 탄생과 함께 고종이 직접 산모를 찾았다고 되어 있다. 궁중의 예법에는 왕이 아이가 태어난 지 초칠일이 지나야 산모를 찾는데 당시 고종의 행동은 이례적이었다. 환갑에 얻은 늦둥이가 그만큼 귀여웠기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얻은 딸을 고종은 너무 귀여워했다. 고종은 늘 덕혜와 함께 했으며,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덕혜를 데리고 오기도 했다. 심지어 1916년 4월 고종은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에 다섯 살 난 덕혜를 위한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덕혜가 외롭지 않도록 동년배 5~6명을 함께 유치원에 다니게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와 옹주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덕혜의 나이는 겨우 6살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나라 잃은 대가를 6살 어린아이도 비껴가지 못했다. 일제는 조선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려했다. 특히 그중에서도 황실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랬다. 일제는 1921년 4월 덕혜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 거류민이 세운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입학시켰다. 당시 그녀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게 되었다. 1921년 5월 4일 <순종실록>의 기록에 “복녕당 아기에게 덕혜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일제는 덕혜를 일본인 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일제는 영친왕(1897~1970)에게 그랬듯이 덕혜에게도 일본 유학을 강요했다. 일제의 압박에 굴복한 순종은 1925년 3월 24일 덕혜의 동경 유학을 명했다. 14세의 어린 소녀는 정든 조국과 궁궐을 멀리 떠나 일본으로 떠났다. 덕혜는 1925년 3월 30일 동경에 도착해서 오빠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가 거처하던 집으로 갔다. 후일 이방자가 쓴 자서전능 보면 “덕혜옹주가 도착한 날 밤 그의 침대 곁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조용히 잠든 앳된 얼굴에는 애수가 서려 있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며 당시의 아픈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덕혜는 영친왕의 집에서 여자학습원이라는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덕혜는 언제나 보온병을 들고 다녔는데, 일본인 친구들이 그 이유를 묻자, “독살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는 데 이미 덕혜는 아버지 고종이 일본으로부터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덕혜가 17살이던 1929년에 어머니 양씨가 유방암으로 숨졌다. 덕혜는 어머니의 묘소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런 슬픔들 때문에 1930년 처음으로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덕혜는 19살이던 1931년 일제의 명령으로 대마도의 귀족 출신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한다. 그는 동경대학교 영문과를 나온 엘리트였으며 시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딸 정혜(正惠)가 태어 낳지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많은 고통을 겪은 덕혜는 정신분열증으로 15년 동안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며 그곳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을 당하기도 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은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하다가 23살의 나이에 일본 남알프스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는 이야기와 혹은 현해탄에서 투신해 자살했다고 한다. 덕혜는 사랑하는 딸마저 잃어버렸다.
일본에서 모든 것을 잃은 덕혜가 해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국내 정치적 역학관계로 덕혜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당시 박정희 국가최고회의 의장이 이방자 여사로부터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덕혜의 귀국을 추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2년 덕혜는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먼저 귀국해 있던 이방자 여사와 함께 지내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그때 덕혜옹주의 나이는 76세였다.
확인은 안 되고 있지만 덕혜는 시를 썼다고 한다. 스물 몇 편의 시가 있다고 전해지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귀국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을 하며 불운한 삶을 이어갔던 덕혜옹주. 아래 글은 그녀가 정신이 맑을 때 남긴 한 줄의 한글메모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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