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세중의 시론 '집 없고, 나라 없는 서러움'
시론/ 집 없고 나라 없는 서러움
외국에서 십여년을 살다 1984년 한국에 돌아와 집을 얻으려니 전세 보증금에 목돈이 들어가서 어찌어찌 오백만원을 구해 쌍문동 꽃동네 산꼭대기에 방 하나를 얻고 어머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살림을 차렸다. 1년 쯤 되자 전세비가 올랐다. 2백만원을 더 올리겠다는 주인 말에 이삿짐을 싸들고 사당동 근처 남자 중학교 옆으로 이사했다. 수업시간 외에는 수천 명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와 매일 소음이 가득한 곳이었지만 가진 거라고는 책밖에 없으니 어려워도 옥탑방 구석에 책을 쌓고 살았다.
1년이 지나자 그 집 역시 전세비를 더 올렸고, 나는 더 구석진 근처의 옥탑방으로 다시 이사를 가야했다. 그러나 1년마다 오르는 전세비 마련과 이사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워져 나는 지인의 권유로 서울을 떠나 의정부로 옮겨가기로 했다. 9백만원에 방 2개짜리 다세대 주택에 전세를 들었다. 일 년이 지나니 올라서 1천 2백만원이 되었다. 매년마다 전세 보증금은 올라갔고 점차 2천만 원이 넘어서자 다시 또 변두리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집 옆이 매일 기차가 지나가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매년 오르는 전셋돈 마련에 시달리려니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가난한 예술가가 시간 강사로 받는 강의료는 전세비용을 마련하기에 턱도 없이 부족했고 달리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폐업을 한 봉제 공장 4층을 얻어 작은 카페를 열었다. 이름을 굿누리라 하였는데 당시는 12시 이후에는 장사를 하지 못하게 하는 심야 영업 금지하던 시절이었다.
그곳에 작은 다락방을 만들어 기거하며 장사를 시작했다. 오르는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려 단속반의 눈을 피해가며 심야 영업을 하려니 예술가에게는 너무나 힘든 세월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아내를 독려하며 하고자 하였던 공연들을 빠짐없이 진행시켰다. 누가 보던 말든 내가 느낀바들을 서슴없이 형상화하여 퍼포먼스 공연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무렵은 참으로 우리 부부 인생 중에서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던 시절이었고 기억할 만한 작품들을 쏟아내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나의 그러한 도전적인 작품 경향들은 당시의 현실에 적응(?) 못함으로써 다시 이 나라를 떠나야 했다. 결심하여 카페를 접고 미국 뉴욕으로 갔지만 그곳 역시 나의 작품 세계를 펼치기에 자유로운 곳은 아니었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즈음 의정부는 신시가지 개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전세 값은 2배로 뛰었다.
매달 월세를 내던가 전세비 5천만 원을 내라는 주인여자의 앙칼진 통보에 하는 수없이 산지사방으로 전세집을 구하려 다녀 보았지만 내가 가진 2천만 원으로는 어림도 없고 구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해맨 끝에 가까스로 북한산부근 쓰레기와 잡초가 무성한 땅을 보게 되었고 땅주인과 합의하에 잠시 거처 할 비닐하우스를 짓게 되었다.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방을 하나 만들어 넣고 전기와 상하수도를 끌어오고 불편은 하지만 사는데 별 지장은 없이 지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무허가 건물이니 집을 헐어야 한다며 어느 날 구청에서 단속반이 나와 멀쩡한 하우스를 무너뜨렸다. 벌금을 내고 경찰서를 오가고 재판을 받고 시달리며 어언 전세살이 33년이 되었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처지나 전세 형편을 얘기 하는 것이 아니다. 전세 비용이 부족하고 형편이 안 닿아 열 번 이상 이사를 가야하는 가난한 전세방 가족들의 비참함이다. 힘들게 벌은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안 먹고 수십 년을 모아야 겨우 아파트 전세금을 마련하는 사람들에게 수 억 수백억을 밥 먹듯 말하고 횡령하고 착복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이 엄청난 괴리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이다.
이제 그것도 아니게 되었다. 죽어라 일해 모으고 대출받아 분양받은 집을 손에 쥐고 있느니 차라리 월세를 주고 나머지로 남은 세월 흥청망청 탕진하려는 풍조가 뜬다는 것이다. 전세를 삼키는 월세 가진 전 재산 모두를 이곳을 짓는데 쏟아 부었으니 이제 이곳을 떠나가게 된다면 빈털터리 신세인데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살아있는 날까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듯 나는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마치 우리의 정부도 마찬가지 꼴이다. 집 없는 나라. 우리 땅에서도 우리가 소유가 없는 땅. 이놈저놈들이 마구 들어와 싸움판 벌이려는 수작들. 우리가 만든 값진 돈으로 그들의 싸움판에 무기가 되어 우리의 목을 조이는 구나, 나라나 우리 꼴이나 우리 땅에서 우리가 향유하지 못하는 억울함과 서러움이 북받친다. 언제 통일되고 복지 평등 사회가 될 것인지 눈물겹다. 글/ 무세중 (한철학연구소 소장. 굿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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