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목사의 '사랑의 질서'
서기원 목사의 '사랑의 질서'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한 바 있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갈대처럼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존재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이 말했듯이, 인간은 우주 및 지구의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 지구 밖에 나가서 지구를 보면 지구는 점처럼 작은 푸른 점에 불과한데, 그러한 지구 안에 살고 있는 갈대는 더욱더 작고 왜소한 생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간은 작은 갈대처럼 지극히 보잘 것 없지만, ‘생각하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파스칼은 인간이 생각한다는 점에서 다른 무기물이나 식물 또는 동물과 구별되는 위대한 점이라고 보았다.
즉 인간은 보잘 것 없이 나약하고 작지만, 생각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갈대처럼 나약하지만, 또한 동물처럼 걸어 다니는 존재이다. 인간은 한 곳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움직이며 운동을 하면서 사는 존재이다. 두 발로 걸어나니는 인간의 특성은 동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나약하면서도 늘 생각하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하고, 걸어 다니는 동적인 존재이기에 정지해 있지 않으려고 한다. 돌이나 신이라면 몰라도 생각하기에 인간은 늘 불안 속에서 살아간다. 불안이 없어지면 행복할 것 같아서 불안을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불안이 전혀 없는 상태는 동물이기를 멈춘 상태 곧 죽음의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인간은 이 죽음과도 같은 권태를 벗어나고자 한다. 이렇게 인간은 언제나 불안과 긴장 가운데 살아가기도 하면서 동시에 지루함 혹은 권태를 살아가기도 한다.
파스칼에 따르면 이렇게 불안과 권태 사이를 살아가는 인간 존재는 언제나 위희(慰戱)를 하면서 살아간다. 여기서 위희란 말 그대로 ‘위로하는 놀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 전체는 기본적으로 권태(倦怠)를 벗어나기 위한 위희이다. 위희란 엄마 아빠가 집에 없을 때 아이들이 인형과 노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엄마 아빠기 없는 집에 혼자 있을 때의 두려움이나 권태를 없애기 위해 아이는 인형을 의인화하여 인형과 대화한다.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에도 주인공 여자는 바빠서 자신과 함께 할 시간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늘 개를 데리고 산책하며 무료함을 달래고자 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이 지구 안에서 불안과 권태 속에 살아간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불안과 권태(vanitas)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파스칼은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 하나는 기하학적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섬세의 정신이다. 기하학적 정신이란 자연을 수학이나 기하학을 모델로 하여 정확히 계산하고 그에 따라 법칙을 발견하는 인간의 정신이다. 인간은 이러한 기하학적 정신과 더불어 섬세의 정신이 있는데, 이것은 자신의 비참함을 자각하고 죽음을 자각하며 자신이 삶과 죽음 사이의 모순가운데 있음을 자각하게 해 주는 정신이다. 섬세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자각하는 존재이다. 이와는 반대로 이러한 자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위희 가운데 살아간다. 위희란 자신의 삶/죽음에 대한 자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피 행각이다. 파스칼은 이러한 섬세의 정신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없다고 한다. 이 두 정신과 구별되는 제 3의 정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정신 혹은 사랑의 질서이다.
사랑의 질서란 파스칼에게 있어 신의 사랑의 질서이다. 다시 말해 무조건적인 절대 사랑으로서의 신의 사랑에 기초한 질서이다.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은 이러한 신의 사랑을 신앙이라는 비약을 통해 자각할 때에만 마음의 안정에 이를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찍이 신(神) 안에서 이외에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했던 것처럼, 파스칼도 인간은 신의 사랑을 자각할 때에만 비로소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약성서의 탕자가 보여주는 것처럼, 나약한 자신을 넘어 절대적으로 아버지를 신뢰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일종의 비약이 일어나야 한다.
이 비약은 파스칼에게 신앙의 비약이다. 파스칼은 이 신앙을 내기에 비유하고 있다. 내기(도박)는 미래에 무언가를 거는 것이다. 파스칼은 우리가 만약 죽은 후에 신이 있다는데 내기를 건다면 확률적으로 유리하다고 한다. 이렇게 내기를 걸었는데, 죽은 후에 신이 없거나 천국이 없으면 손해 볼 것이 없지만, 만약 신도 천국도 없다는 데 내기를 했을 경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은 이렇게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우리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확률 높은 도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사는 것이 인간에게 더욱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현재의 맥락에서 보면, 꼭 기독교 신앙이라는 내기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사랑의 질서에 편입시키지 않고는 하루도 편하게 살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다 타인의 사랑에, 타인은 나의 사랑의 의지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의 질서 안에 사는 것, 이것이 가장 원천적인 행복이 아닐까? 글/ 서 기 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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