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사죄의 원칙'
시론, 사죄의 원칙
사죄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을까? 흔히 사과 혹은 사죄는 두 당사자 사이의 문제이기에 경우에 따라 다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원칙이 있다. 사과(죄)하는 사람이 그 사회의 일반적인 규칙에 맞게 사과(죄)해야 한다. 먼저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제가 잘못을 했네요”등등의 표현을 통해서 자신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사과는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언어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고 해서 사과(죄)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미안하다는 말을 했는데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과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야 한다. 만약 말은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미안하다니까요.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뉘앙스의 말을 계속하게 된다면, 사과를 받는 사람은 상대방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
여기서 사과(죄)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 나온다. 그것은 진정성이다. 우리는 1차적으로 상대방의 말을 통해 그 진정성을 확인하지만, 말은 말 그대로 말로 그칠 우려가 있다. 상대방에게 많은 상처와 피해를 가져다주고, 그에 대한 대응 조치가 따르지 않은 상태에서 말로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말에 대한 후속 조치가 있어야 한다. 일단 사과 한 다음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는 이미 사과 했고, 이미 다 보상했습니다.”라고 떠들어 대는 태도는 사과의 진정성에 의심이 들게 하는 행동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사죄를 한다면, 그 당사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 사람들의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사과를 해 놓고, 이제 더 이상 사과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다면, 그러한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을 반영한다. 사과 해 놓고 사과하는 사람이 취해야 할 태도는 상대방의 반응을 겸손하게 기다리는 일이다.
사과할 때 중요한 원칙이 또 있다. 사과는 잘못을 한 당사자에게 해야 한다. 당사자가 아닌 사람에게 사과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사과가 될 수 없다. 피해 당사자가 용서하고 수용할 수 있을 때 사과가 성립되는 것이다. 피해 당사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나는 이미 사과했다고 말하면, 이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불발된 사과이다. 영화 ‘밀양’의 원작인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진정한 사과와 용서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은 학살의 주동자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다 용서했다고 나서서 말하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영화에서는 감옥에 있는 죄인이 피해당사자가 용서하지 않았음에도 신에게 이미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피해 당사자도 아닌 신이 어떻게 나를 대신해서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정부와 정부 사이에 있는 사과의 원칙도 마찬가지이다. 피해 당사자들의 상황에 대한 이해, 피해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을 기반으로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러한 사과는 외교 관계를 위한 위장된 쇼에 지나지 않는다. 위안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었어야 했고,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반영했어야 했다. 그들은 용서할 마음도 없는데, 위정자들이 나서서 이미 다 용서해 버리고 화해를 한다면, 여기에서는 진정한 사죄가 일어날 수 없다. 당사자가 빠진 상태에서 일방적인 사과와 용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과와 용서가 아니다. 한일 양국 정부가 잘못된 사과/용서를 한 것은 이 점에서 분명해 진다. 최근의 합의는 당사자가 빠진 공허한 문서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질적 피해보상이다. 사과하는 사람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기 위해 동상철거를 위해 비용은 낸다고 하면, 이것은 사과가 아니다. 이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지, 진정으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돈을 더 많이 주어야 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의 진정한 반성과 재발 방지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적인 의미도 생각했어야 한다. 왜 이런 엉터리 사과/용서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져야 했을까? 아마도 중국을 주적으로 하여 대립구도를 만들어 가려는 미국의 압력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동맹이 과거 위안부 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지 않으면, 미국의 안보정책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글/ 서 기 원(의정부 의료원 원목)
*제241호 3면, 시론으로 '사죄의 원칙'이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편집실수로 다른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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