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죽하면 자식을 학대 하겠나. 하지만
시론
오죽하면 자식을 학대 하겠나. 하지만
자기가 난 자식을 왜 학대하나 생각해 보자. 세상에 자식 사랑을 이기는 자가 없다. 자기가 낳은 자식들은 피를 나눈 자기 자신들인데 왜 그리도 가혹하단 말인가. 따져보자. 이 문제는 나라가 망하는 문제보다 더 크다. 더 시급하다. 세상에 생명으로 나온 생명체는 이 세상을 누릴 자유가 있고 이 세상을 살아나갈 권리와 함께 살아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생명체를 가해하는 일은 절대로 어떠한 경우라도 용서 받지 못하며 용서받을 수 없다. 더구나 자기 형체에서 나온 새끼는 누가 뭐래도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되고 사랑 받아야 하는 것이 아름다운 천리(天理)다.
그런데 왜 남의 아이 아닌 자기 아이를 그토록 학대하는 부모의 문제가 사회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 하는가.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고 천륜(天倫)을 배반한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하겠지만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언론에 비추어 진 것은 극소수의 경우라고 하지만 그런 무시무시한 짓들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한마디로 자기 아이들을 학대 하는 것은 가정 파탄일 뿐 아니라 가정의 존재 가치가 없어지는 결과로 이어진다. 바퀴 공이 있는데 바람을 계속 불어 넣으면 제일 약한 부위가 터지게 되고 그 다음엔 바퀴가 터지고 차가 전복되고 그 다음에는 인명이 손상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붕괴되고 만다.
하루같이 불어나는 이자 갚기에 숨이 막히고, 사정없이 몰아쳐오는 빚 독촉에 돈 버는 재주는 없고, 서로 연줄로 묶어주던 가족 관계들도 나 몰라라 하고, 끼니때마다 등교할 때마다 아이들은 칭얼거리고, 멋모르고 놀아 날 때마다 안타깝고, 남들만큼 못해줘서 하소연 할 곳은 없고 그러면 자연 주변이 거추장스러워지고 뿔대가 나고 욕이 튀어 나오고 스스로 자학 하기위해 술로 놀이로 몰아붙이는 자신을 본다. 자신을 죽이고 싶어진다.
사랑의 끝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천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죽음 쪽으로 자신들을 몰아간다. 허허벌판 혈혈단신 아무도 이해해주거나 도와주는 이 없는 지옥 같은 세상, 살벌한 콘크리트 아파트 감옥에서 자기가 난 자식은 없어져야 편하다. 부모의 가난함으로 없어서 살아남을 여력이 없어서 죽어 버리면 끝나는데 철모르게 외롭게 남아서 배곯아 죽을 자식 생각하니 함께 죽여 데리고 가거나 모든 죄가 자식 때문이라며 몰아서 학대하는 것은 가정 사회 나아가 나라를 죽이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는 이 세상에 또는 다음 세상에 다시는 살아나올 수 없는 생각이며 행위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온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며 용서 받을 수 없는 최악의 경우임을 알아야 한다. 생명을 망각하여 생명체를 학대 한 자는 영원히 저주받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언제라도 되돌아올 희망도 없어진다. 죽은 다음에도 영원히 남의 발바닥 아래 짓밟히게 된다. 영원히 생명의 아름다움을 다시 맛볼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자기 새끼들을 살상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들은 다음 생애에 어느 세월에도 구차스럽게도 살아남지 못하고 남의 밥상위에 고기처럼 다져지고 볶아지고 끓여져서 고통을 받고도 다시는 이 세상에 올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아무리 희망 없는 삶을 살고 있더라도 제발 생명을 학대하거나 손상시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곧 보다 나은 행운이 반드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리랑 가사에도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간곡히 애원하고 있다. 아름다운 인생들은 살아야 할 그날을 위하여 설상가상 없다하더라도 살아야 할 가치가 있는 성(聖)스런 생명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며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인 처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혁명이다. 글/무세중 (통일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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