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목사컬럼/ 죽음과 부활
서기원 목사컬럼/ 죽음과 부활
우리는 흔히 죽음을 개체 생명체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큰 생명의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 그 자체는 죽지 않고 존재한다. 지극해 개체적인 생명의 차원에서 볼 때에만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인 셈이다. 개체적인 생명체라고 말했지만, 개체로서의 생명체는 외부 생명과의 교섭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우주의 생명과 독립된 개별적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심장의 박동을 매개로 외부와 끊임없이 교섭하고, 배고픔을 통해 외부 생명체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유기체이다.
개별 생명체란 나와 주변 생명의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타인과의 관계 가운데서 살아간다. 타인과의 관계 ‘사이’에서 존재하는 인간(사람-사이, 人間)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개체 생명체가 죽는다 해도 타인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개체 생명체는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후손들이나 친구들 또는 지인들에 의해서 기억되고 여전히 기념되고 있다면, 물리적 육체만 존재하지 않을 뿐, 그의 이름은 계속해서 타자의 기억과 추억 속에서 힘을 발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타자의 기억 속에서 망각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또 다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친한 지인의 죽음을 통해서 나의 죽음을 경험한다. 타인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도 멀지 않았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때 나의 죽음은 ‘너’의 죽음을 통해 죽음 경험이기에 2인칭적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죽음은 지인과의 멀고 가까움의 관계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날 수가 있다. 우리는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달리한다.
위의 두 죽음과 달리 3번째의 죽음이 있다. 이것은 3 인칭적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앞의 개체 생명의 다함으로서의 1인칭적 죽음, ‘너’의 죽음을 통한 나의 죽음으로서의 2인칭적 죽음과 달리 3인칭적 죽음이다. 이것은 내가 잘 모르는 불특정한 제3자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나의 죽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죽음 경험이다. 이때의 죽음은 나와는 아주 멀리 동떨어져 있다.
서기원 목사컬럼/ 죽음과 부활
그러한 죽음이 나에게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죽음을 회피의 방식으로 경험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회피의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진정 죽음을 경험할 때란 두 번째의 죽음에서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 죽음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이다. 죽으면 더 이상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3인칭적 죽음은 전혀 나와 상관없는 죽음이기에 이러한 죽음도 우리는 경험할 수 없다. 두 번째 죽음은 친한 관계 곧 ‘너’의 죽음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나’의 죽음의 경험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억울한 죽음들이 많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그렇고, 예수의 죽음이 그러하며, 종교재판에 의한 브루노의 죽음이 그렇고, 무수히 많은 충신과 순교자의 죽음이 그러하다. 이러한 죽음들은 개체적 생명체의 끝으로 끝난 것 같지만, 이 사람들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너’를 통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너’와의 관계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문화와 역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슬픔도 공감도 없는 우연한 죽음 속에는 자연의 순환과 정글의 법칙만이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4월에 되면 부활절 절기를 보낸다. 마치 꽃이 지었다가 새로운 봄이 되면 피듯이 그렇게 새로운 생명의 시작과 더불어 부활절 절기를 맞이한다.
우리가 4월에 기억해야 할 ‘너’의 죽음이 또 하나 있다. 세월호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어간 우리 아이들의 죽음이다. 종교의 제의 행사처럼 단지 이 기간을 추모제로 속죄하고 반성하며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자주 추모제나 기타 제의를 통해 억울한 죽음을 망각의 저편으로 보내고자 한다.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통해 드러난 불의한 사회, 잘못된 정부, 무책임한 행동들을 들춰내며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우리의 기억가운데 살려 내야 한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죽음을 나와 친한 ‘너’의 죽음으로 기억하는 한 언제나 살아있다. 예수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여전히 우리들 모두의 ‘너’의 죽음으로 우리의 기억 가운데 부활한 것처럼, 그들은 우리들의 새로운 결단과 더불어 우리의 가슴에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이 2016년 꽃 피는 4월, 한국 기독교회와 더불어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죽음과 부활이다. 서기원(의정부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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