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신학(목사)의 길'
신학(목사)의 길
파스칼이 신봉했던 얀세니즘(Jansénisme)종파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야기가 있다. 만약 세상은 악(惡)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 세상에 맞서 싸울 용기도 없고,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떻게 할까? 그렇다고 이 세상의 악과 타협하고 사는 것도 용납되지 않을 때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혁명을 꾀할 상황도 아니고, 그것이 실현될 가능성도 보이지 않아서 스스로 그러한 선택을 할 만큼 열정도 없지만, 그와 반대의 길 즉 세상과 타협하며 사는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현대인들은 이러한 몇 가지 상황 가운데 직면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좋은 것이 좋은 거라고 하면서 세상과 타협하면서 사는 길이 그 하나이고, 아무래도 지금의 이 세상은 뭔가 잘 못되어 있어 라고 말하며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차근차근 세상을 바꾸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외에도 제 3의 길이 있다. 이것은 세상의 불의와 악에 타협할 수도 없고, 과감한 사회 변혁을 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하는 길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사는 길이다. 불의를 노래하고, 불의를 고발하며, 불의한 시대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며 사는 길이다. 물론 지금의 여야 정치인들처럼 이 시대가 불의한 시대인지도 모르고 졸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문학 평론가 김우창이 해석하고 있듯이, 만해 한용운이 ‘님’이라는 글자로 표현했던 시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해당한다. 이 ‘님’은 첫 사랑의 연인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한용운이 말하는 ‘님’은 우리들의 가져야 할 순수 이상향에 가깝다. 불의한 시대에서는 사라지고 없는 그래서 간절하게 추구되어야 하는 이상적인 어떤 것이다. 불의한 시대에는 ‘님’은 보이지 않고,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이 사라진 ‘님’을 노래하며,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삶 곧 종교인의 삶, 시인의 삶을 살았다.
그 옛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도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야훼의 법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잘못된 길을 버리고 야훼께 돌아와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은 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로부터 벗어나면,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야훼에게로 돌아오면,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풀어주신다는 메시지를 그들은 전달했다.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길을 거부하고,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하다가,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 니느웨로 가는 예언자 요나의 삶도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서의 삶이었다.
예수 또한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닌 율법의 종교를 비판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유대교 이익 집단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불의한 시대를 고발하고,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살았다. 그는 엄청난 율법조항으로 되어 있는 족쇄로부터 자유를 선포하였다. 유대교 이데올로그(ideologues)들에 입장에서 보면, 그는 자신들의 신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이단이었다.
그는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살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사도 바울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이 예수를 증언하며 살았다. 오늘 신학자를 비롯한 목사들은 모두 예수의 증인으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만들어 제도를 공고히 하는 유대교 율법주의와 무엇이 그렇게 다를까? 자신들의 생각이나 신앙과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려고 하는 태도는 불의에 맞서 증인으로 살다간 예수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세상의 악과 불의에 무관심하고, 이 사실을 알더라도 이를 증언하고 고발하기 보다는 침묵한다. 그들은 신의 계시의 장소를 좁은 교회로 좁혀 버렸고, 번개처럼 어느 날 갑자기 들려오는 계시의 주문에 사로 잡혀, 불의한 세상 한 복판에서 고통당하는 신음소리로 다가오는 신을 외면한다. 신학의 길, 목회자의 길이란 불의한 시대의 증인으로 사는 길이다. 본회퍼 목사의 말처럼, 예수는 기독교라는 종교에로 우리를 부르지 않고 세상으로 불렀다.
그는 기독교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신학(목사)의 길이란 예수를 종교적 창시자로 신봉하는 삶이 아니라, 그의 삶을 증언하는 삶이다. 예수는 자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첨부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글/서기원(의정부의료원 원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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