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까지 바친 사관(史官)들의 기록
기자수첩 목숨까지 바친 사관(史官)들의 기록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사관(史官)은 고려와 조선시대 역사의 초고(草稿)를 작성하던 관리다.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草稿)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들이다. 예문관 검열 또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이른다. 쉽게 표현하면 역사의 정확한 기록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정확한 기록을 했던 지독하게도 융통성이 조금도 없는 역사학자들이었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라는 사관이 있었다. 그는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으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직필하고, 그 뒤 헌납(獻納 조선시대 임금에게 충언을 올리던 일) 때 이극돈과 성준(成俊)이 새로 붕당의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 이극돈의 원한을 샀다. 그는 이런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했기 때문에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처형되었다.
안명세(安名世 1518∼1548)이라는 사관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다. 그 역시 자신이 쓴 글 때문에 처형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간사한 재상들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1567년 선조가 즉위한 뒤 1570년에 그는 비록 죽었지마는 복권되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최저가 임금을 살해했다. 그때 사관 삼형제가 차례차례 나서 ‘최저가 임금을 죽였다’고 기록했다. 당시 최저는 삼형제 사관들에게 “쓰지 말라”고 했지만 기록되었기 때문에 큰형, 둘째형을 처형했다. 그리고 최저는 막내 동생만큼은 기록하지 않았을 줄 알았지만 막내 역시 사실을 기록하자 두 손 들고 말았다.
조선의 태종도 사관에게 혼줄 난적이 있었다. 끈질기게 자신의 잘잘못을 기록해대는 사관 민인생(閔麟生)때문이었다. 1401년 태종이 화를 터뜨리며 ‘사관 금족령’을 내렸다.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인 편전(便殿)까지 들어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 민인생에게 “편전은 임금이 쉬는 곳이야. 사관은 들어오지 마!”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민인생은 당당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전일에 문하부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태종은 목소리를 조금 높여 다시 명령했다.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그러자 민인생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따지듯 물었다.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고 또 경연(經筵)의 강론을 하는데, 신과 같은 사관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이런 민인생을 달랠 심산으로 태종은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민인생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이렇게 답했다.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1735년 영조는 대신들과 나눈 밀담을 기록한 기록을 불태워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전직 사관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목이 달아난다 해도 사필을 굽힐 수 없습니다(頭可斷 筆不可斷).” 그리고 사관들이 목숨을 내놓고 직필하려는 이유를 영조에게 알렸다. “후세의 폐단을 만들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조선후기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말 까지 다룬 역사책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보면 저자 안정복은 사관들이 정확하고 정직하게 역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해 “쓰지 않으면 선악의 자취가 깡그리 사라져 난신적자들이 날뛰기 때문”이라 했다. 그리고 ‘춘추필법’에 따르면 역사가의 객관적이고 엄정한 비판이 없다면 바로 ‘군자의 불행이요, 소인의 다행’이라고 했다. 요즘 대한민국 최고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가 생각나 몇 자 적어보았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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