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의 의미
예수 탄생의 의미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대속(代贖)의 상징으로만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속(自贖)의 차원에서 예수의 삶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가 나를 위해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단번에 구원에 이른 것처럼 생각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마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죄수처럼, 말로 믿고 회개하면 저절로 은총이 주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예수에 대한 믿음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이 강조가 되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이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를 말하고,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한 것은 당시의 율법조항 및 여러 가지 의례와 전통에 대해 저항하며 성서의 본래적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바울에 의해 유대교 율법주의에서 벗어나 누구에게나 신앙의 길이 열리고, 루터에 의해 개신교가 등장하여 신부를 통하지 않고서도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신앙의 길은 다시 제도적 은총으로 변질되었다. 이는 다시 실천이 결여된 입술신앙의 믿음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아도 회개하고 은총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세례 교인으로 등록하고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만 잘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이 다시 제도적 은총으로 바뀐 것이다. 이미 신약 성서 안에도 행함과 믿음에 대한 강조가 있다.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며 도시 한 복판에 성탄 트리를 하고 점등식을 하기도 한다. 성탄 트리는 어느덧 네온사인과 더불어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연말의 상징이 되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가 되어 오늘날의 성탄은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즐기는 명절처럼 되었고, 휴가와 휴식의 시간이 되었다.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는 칸타타와 여러 행사를 하는 제도적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성탄을 소비, 즐김, 휴가 그리고 음악회를 위한 절기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망각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성탄의 주인공 예수 그 자체이다.
오늘날에는 점차 성탄절에 예수 탄생의 의미를 자각하고 실천하려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성탄절에 우리는 예수가 살았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가 한 말은 신약성서에 수없이 많이 있지만, 올 해에는 성서의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을 되새기며 성탄절을 보내면 어떨까 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로마서 12:15)라는 말이다. 최근에는 세월호 사건으로 많은 아이들이 죽었고, 올 해에는 중동호흡기 증후군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양극화 현상과 더불어 아픔과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청년 실업자도 많아져서 3포 세대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업의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는 삶이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삶이 아닐까?
예수의 믿음에 따라 그를 본받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를 단지 입술로 믿어서 교회 회원권을 얻고 회원들과의 사교를 한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과 과오 및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대속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 고백하는 믿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속죄하는 자속(自贖)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 자신이 매순간 신의 은총으로 살고 있다는 고백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삶을 완성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그의 삶이 나의 본보기가 됨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예수처럼 살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것은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예수 믿기는 곧 예수 살기에 다름 아니다. 예수가 이 땅에서 한 일들을 기억하며, 그를 알아가는 자속(自贖)적 실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는 예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몰두하였고, 마르다는 예수와 손님들 시중들기에 바빴다. 나중에 마르다는 마리아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오늘날 교회는 마리아의 길에서 예수를 따르는 삶의 모범을 찾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마르다야 말로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녀는 이미 예수의 메시지를 알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에 말이다. 그녀는 말로만 머리로만 예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예수 탄생의 의미 곧 예수를 맞이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타인을 위한 삶(life for others)에 있는 것이다. 우는 자와 함께 우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 살기이며, ‘거룩한 탄생(聖誕)’의 의미가 아닐까? 서 기 원(의정부 의료원 원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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