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목사의 시론 '종교와 관용'
종교와 관용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는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 갈릴레이는 흔히 기존의 기독교적 세계관과 배치되는 지동설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이중진리설 때문에 당시의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에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스스로 만들어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었고, 이 관측 결과 기존의 입장과 배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발견 자체는 자신에게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신의 섭리에 따라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 및 모든 지구주의의 별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이는 자유낙하 실험으로도 유명하고, 또 진공 상태를 가정하기도 하는 등 기존의 가치관과 다른 실험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는 만약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는 수학자였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가 보기에 신이 계시를 내린다면 성경과 전통을 통해서도 계시를 내리기도 하겠지만, 수학의 암호로 자연 속에 자신의 의도를 감추어 두었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신의 계시의 암호를 풀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할 수 있는 신부만이 아니었다. 모든 자연의 피조 된 작품을 수학의 언어로 해명하는 과학자들이 신의 계시를 풀어헤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신은 특수 계시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자연법칙에 의한 일반 계시를 내리는 분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생각이 화근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는 신앙의 시대에, 이성의 계시를 외친 갈릴레이는 신의 특수한 계시와는 다른 계시를 주장함으로써 이단이 된 것이다. 당시의 가톨릭 전통에서는 천동설에 대비되는 지동설은 다만 새로운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누군가 새로운 이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그것이 큰 도전이 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만이 신의 계시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한 신부의 입장에서 볼 때, 과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이 신의 계시를 풀어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겉으로 드러난 원인은 종교적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자신의 기득권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흐르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갈릴레이와는 달리 루터는 신부답게 신앙을 통해 신앙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교황을 통해서만 신에게 이르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믿음만 있으면 직접 신에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가톨릭 전통에서 보면 신앙을 통해서 신에게 이르는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것 자체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 또한 기존의 가톨릭 전통에서 보면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신부나 교황을 통하지 않고 개인 스스로 신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열려진다면, 자신의 존재의 의미가 크게 위협받기 때문이다. 전통이 아니라 능동적인 개인의 신앙이 중요하고, 성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이성이 중요한 시대가 다가오자, 언제나 전통에 입각하여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 오던 기득권층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면서 스스로를 바꾸어 가든가, 아니면 이미 가지고 있는 힘으로 새로운 생각을 누르던가 하는 두 가지 길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루터나 갈릴레이 등에 의해 열려진 근대세계는 지나치게 이성을 강조하고, 지나치게 개인의 신앙만을 강조한 나머지 이성중심주의와 도덕적 실천이 빠진 맹목적 신앙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서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이나, 자신의 신앙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영역과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배타적으로 태다는 태도에 있어서는 근대의 이성주의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닮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속에서는 근대를 넘어선 근대 이후의 시대가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는 이러한 시대에 대한 안목과 관심이 없다. 그 옛날 가톨릭처럼 개신교도 이제 이미 기득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오직 예수이름으로만~ 이라고 하는 표어아래 관용의 가치가 상실되어 간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도구적 이성, 도구적 신앙으로 전락해 간 현대 사회와 기독교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이유이다. 만약에 오늘날 누군가 모든 종교가 다 나름의 구원에 이르는 길이고, 심지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도 모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글/ 서기원(본지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
|
[ Copyrights © 2010 북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