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정조의 기우제(祈雨祭)를 생각하며'
기자수첩 정조의 기우제(祈雨祭)를 생각하며
기우제는 말 그대로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제사였다. 중국 삼국지에도 제갈공명이 기우제 지내는 장면이 있고, 일본도 기우제를 지낸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기우제를 ‘간절히’ 올리는 국가는 별로 없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한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에는 당연히 기우제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시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사서인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ˑ 1452년 편찬)에 기우제를 행하는 예법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가뭄 때에는 죄수들을 자세히 심리하여 죄 없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무덤이 파헤쳐져 밖으로 드러난 해골을 묻어 주었다. 그리고 큰 산이나 강·바다는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곳이라고 하여, 그곳에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종묘에 가서 빌었다.
이와 같이 7일마다 한 번씩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큰 산·강·바다에 처음과 같이 기도하고, 가뭄이 더욱 심해지면 기우초제를 지내는 제단인 기우단에 제사 지낸다. 장터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모자 쓰는 것, 부채질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관마(官馬)를 먹이는 데는 곡식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살도 금하였다. 조정에서는 국왕과 백관들이 근신하였다. 국왕은 정전을 피하여 밖에서 정무를 보았으며, 반찬의 가짓수도 줄였다. 이것은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는 것은 국왕이나 조정의 대신들이 덕이 없어 정치를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군주들은 비가 오지 않는 등 천재지변이 생기면 모든 것이 자신의 부덕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더 근신하는 행동을 하지 않아도 최소한 나라의 위기가 있을 때 자신을 책망하고 근신하는 정신은 우리 조상들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기본을 가진 지도자가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지독한 가뭄과 메르스라는 질병이 창궐하고 있는 요즘. 서울의 어느 재래시장을 방문, 환한 웃음을 지우며 시장 상인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은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보면서 조상들의 ‘기본’이 너무 절실하다.
1782년 조선의 정조대왕은 당시 지독했던 가뭄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위해 왕실 행차 대신 별운검(호위무사) 2명만을 대동하고 기우제를 올렸다. 그리고 기우제가 끝나자 신하들이 국왕의 전용 가마인 법가(法駕)를 타고 환궁하라고 했으나 정조는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지냈는데 비가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니, 나는 실로 백성을 대할 면목이 없다. 어떻게 법가를 타고 일산(양산)을 쓰겠는가" 하고는 끝내 걸어서 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우제를 지낸 다음날 많은 양의 비가 내려 가뭄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하늘이 정조의 심정을 알아낸 것이라고 생각한 많은 백성들을 이때 내린 비를 ‘희우(喜雨)`라고 불렀다.
‘민본(民本)’이라는 말은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根本)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 라는 의미다. 민본정치를 백성에게 심어준 정조는 “하늘이 듣고 보는 것은 백성을 통하여 듣고 보는 것이다. 하늘이 밝히고 두렵게 하는 것 또한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밝히고 두렵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과 백성은 통하는 것이나, 땅을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을 공경해야 한다. 백성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던 조선 최고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정조의 민본정치가 아쉬운 지금의 시대적 환경이다. 글/ 현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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