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풍물시장 보물찾기'
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풍물시장 보물찾기
나는 시간이 나면 동묘주변 풍물시장을 찾는 버릇이 있다. 내가 사는 동네인 새절역에서 전철을 한번 타면 갈 수 있어서 참 좋다. 풍물시장은 그야말로 온갖 구제품과 진귀한 품절 골동품이 난장판인 값싼 벼룩시장이다. 만 원짜리 한두 장 챙겨서 발품을 팔며 보물찾기하듯 한 바퀴 돌면 운동도 되고 아이쇼핑도 그만이다. 그러다가 미상불 제대로 된 물건을 만나면 도심 속에서 ‘심봤다!’ 소시민적 작은 횡재의 기쁨을 맛본다고나 할까?
내가 중학교 시절까지 자란 남쪽 바닷가 고성(固城) 5일장의 장국밥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서울 풍물시장에서 재회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옛 소가야인 고성엔 영화상영관으로 가야극장이 있었다. 바로 그 영화관 앞 ‘총쟁이집’ 돼지국밥은 유명했다. 주인이 총쟁이로서 꿩이나 산토끼, 노루 등을 잡는 수렵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그야 어쨌든 어느 날 나는 고향 장날의 정취를 되살리고 사람냄새까지 만끽하며 풍물시장 보물찾기를 즐기는데, 상하의 가리지 않고 무조건 두벌에 3천이라고 외치는 상인의 걸쭉한 목소리에 이끌렸다. 한 벌은 물론 2천원이다.
나는 몰려든 사람들 틈에서 산더미같이 쌓아놓은 구제품 옷을 파헤쳐 바지와 셔츠 2벌을 어렵사리 건졌다. 헐값에 황토색보다는 차라리 팥죽 색깔에 가까운 독특한 천이 눈에 띄어 무턱대고 사고 본 건데, 사실은 자전거 탈 때 작업복 비슷하게 입을 요량이었다. 우리 동네엔 불광천이 있어서 한강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멋지다.
나는 풍물시장에서 거저다 시피 산 옷을 집에 와서 손수 세탁한 후에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지 끝이 헤어져 너덜너덜했다. 살 때는 그깟 두벌 다 해봤자 3천원인데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통 큰(?) 생각에 몰랐었는데 막상 세탁까지 하고나니 조금은 꺼림칙했다. 보나마나 메이커도 외제 짝퉁 아니면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쯤 되겠지 하고 확인해보는데,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뜻밖의 대반전이랄까, 닳고 닳아서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자는 아무리 봐도 ‘MADE IN D.P.R.Korea’가 아닌가! 북한제가 틀림없었다. 게다가 원 주인인 이북동포의 키가 상당히 컸던 모양이다. 헤어진 바지 끝을 잘라내고도 수선집의 바느질을 거치니 처음부터 내 몸에 맞춘 것처럼 길이가 딱 맞았다. 나는 내친김에 전용 허리띠마저 샀다. 이 구제품이 어떻게 풍물시장까지 흘러들어왔는지는 알바가 아니다.
사실 나는 올해 광복과 분단 70년을 맞아 무대에 올릴 연극을 고민하고 있던 참이다. 전쟁둥이로서 <도라산 아리랑><에케호모(ECCE HOMO)><조통수(祖國統一喇叭手)><버들피리> 등 예닐곱 편의 작품을 통일연극이라는 문패를 달고 무대에 올린, 이른바 통일연극 시리즈 작가로 자칭하는데 올해를 그냥 보낼 수 없다. 다행히 뒤늦게 지방에서나마 뮤지컬<백범 김구> 공연이 결정되고, 왜상(倭傷) 희곡 <우리들의 광시곡(원제•노르마)>이 신문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소개된다니 겨우 체면유지는 하는 셈이다.
글쎄,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만난 구제 북한바지는 나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 나는 바지를 처음 입어보고 나서 혼자서라도 착복식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낯선 생각부터 하는데, 때마침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평소에 모시고 술자리를 자주 하는 편인 권성덕 원로 연극배우시다. TV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역으로 잘 알려진 그분인데, 이것 또한 무슨 조화인가 싶었다. 나는 권 선생님을 만나 술잔을 나누며 시방 입고 있는 ‘바지의 역사’와 착복식 운운 떠벌렸더니, “원가 일천오백 원짜리로 길이수선에 전용 허리띠, 착복식 술판까지 치르다니… 거참 대단한 바질세!” 재미있다고 껄껄 웃으신다.
나는 올해가 다 가도록 통일연극이나 왜상희곡을 한편이라도 무대에 못 올리게 될 형편이면 연말에 자비를 들여 통일연극시리즈 희곡집 출판이라도 대신할 계획이었다. 그런 고민이 사실상 해결된 마당에 찾아온 이 행운이야말로 풍물시장 최고의 보물 내지는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어느덧 착복식 막걸리에 취해 이것이면 애당초 통일연극도 희곡집도 다 필요 없다는 엉뚱한 배짱이 생겼다.
내참, 이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북한제 구제품 바지를 입는 순간 작은 통일을 이뤘다고 내심 감격하여 기고만장해진 전쟁둥이의 심리상태는 과연 무슨 병리현상일까? 나는 이대로 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에 몸을 실어 한강이 아니라 남북을 잇는 통일대로를 거쳐 압록강을 지나 두만강을 거침없이 달리는 그림을 살짝 그려본다. 어쩌면 나는 풍물시장에서 우연찮게 산 북한제 구제바지 하나에도 하나 된 한반도 조국을 대책 없이 꿈꾸는 구제불능 통일 낭만파인지 모르겠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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