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 목사의 시론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시론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
경제학자 케인즈는 복지국가가 되어서 잘 살게 되면 사람들의 욕구가 실현되어, 안정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그가 예언했던 대로 경제수준이 높아져 모두가 잘 살게 되었는데도 사람들 대다수는 여전히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이 훨씬 더 잘 살게 되었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충분함’이라는 것은 사라졌다. 인류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여 많은 연봉을 받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강남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며,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모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죽으려고 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남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고 ‘충분함’ 그 자체임에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과연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이 가진 소유에 만족하고, 자신이 욕구가 충족되었다고 느끼게 될까?
케인즈는 인간의 욕구를 너무 단순하게 평가했다. 이것이 바로 케인즈의 오류다. 인간은 욕구가 충족되어서 만족할 줄 아는 동물이 아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남보다도 우위에 있으려고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타인과 비교하여 경쟁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이 충분하게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신혼부부가 결혼하면서 집을 장만했다. 양 쪽 집안이 부유하여 집안에서 돈을 합쳐서 집을 사도록 해 주었다. 그런데, 집값이 너무 비싸서 융자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들은 집을 사고, 맞벌이를 하여 융자를 갚으려고 열심히 일했다.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집안이 엉망이었다. 그래서 부부는 청소를 하는 가정부를 두기로 결심, 부부가 출근한 사이에 청소부 아줌마가 와서 청소를 해 주도록 하였다. 여느 때처럼 부부는 아침에 차를 나고 나가다가 그만 집안에 두고 온 서류를 기억해 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멀리 어떤 집 베란다에서 한 아주머니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부부는 부럽다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가까이 갔다. 그런데 가까이 가보니 그 베란다는 바로 다름 아닌 자신들 집의 베란다였다.
이들 부부는 순간 그 청소부 아줌마가 꼭 그 집 주인처럼 느껴졌다. 문서상으로 그 집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들인데, 그들은 집을 단지 ‘잠자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고, 자신들은 융자한 돈을 갚느라고 집을 향유할 틈이 없는데, 청소부 아줌마는 아침 청소를 마치고 여유 있게 차 한 잔을 마시며 집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진정 그 집의 ‘주인’이란 말인가? 오늘날 우리들은 이처럼 ‘소유와 행복의 역설’에 빠져서 살아간다.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소유하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끼는 역설에 빠져 버린다. 이 역설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만족 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행복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들의 행복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어떤 것을 가져서 얻게 되는 행복이 있고, 다른 하나는 태도의 변화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 사람들은 전자의 행복에 몰두한 나머지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망각하면서 살아간다. 사람들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태도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소유의 가치를 행복의 가치와 동일한 선상에서 놓는 전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암묵적인 전제 가운데서 살아간다. 스펙이 좋고, 학력이 좋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과 차가 있으면 당연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행복이 더 넓은 가치이고, 돈은 이 행복에 비해 부수적인 것이다. 즉 돈은 행복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긴 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유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면 그 소유물에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은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법정 스님은 에세이 『무소유』에서 난(蘭)을 키우다가 남들에게 주었을 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자주 행복의 가치에서 망각하는 것이 있는데, 줄 때의 행복이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주는 데서 행복을 느끼듯이, 남에게 주고 베풀 때 진정으로 풍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남과 비교하여 경쟁하면서 시간이 없다는 말을 반복하며 행복의 역설에 빠져 살아간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있어야 충분할까? 글/ 서 기 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