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방영숭의 문화에세이 '우리 삶의 패러독스'
패션디자이너 방영숭의 문화에세이 '우리 삶의 패러독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전쟁에 참전한 막내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는 너를 위해 매일 밤 하나님께 기도했단다. 너무 너무 보고 싶구나” 그러자 아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머니 정말 보고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 이번에 집에 갈 때 제 친구와 같이 가면 안될까요?” 어머니는 “그래 함께 오렴” 하면서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그 친구는 이번 전쟁에서 다리를 하나 잃었어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어머니는 괜찮다며 허락했습니다. 어머니의 허락에 아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그런데 그 친구는 두 팔도 다 잃었어요. 그래도 괜찮겠지요.” 어머니는 무척 꺼림칙했지만 사랑하는 아들의 완곡한 부탁이라 승낙했습니다. 아들은 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그 친구는 두 눈도 잃었어요. 그래도....” 아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 그 친구와 함께 오지 말고 너 혼자 오너라.”
그 아들은 무척 망설이다가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그 건물에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다리가 하나 없고 두 팔과 두 눈이 없는 아들의 친구는 바로 그 어머니의 사랑스런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삶의 패러다임 교체를 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주류의 첫 번째 임무는 지식보다는 지혜고 변화보다는 진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지식인의 논리라는 것은 다른 지식을 가진 자와 교호(交互)하여 최상의 지혜에 이르는 것으로, 그래서 이런 논리는 상식과 논리에 호소하면서 ‘보편성’의 목적을 암묵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조금은 위험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작용과 반작용 같은 만물의 기본법칙에서 악간 비켜나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자칭 지식인들만 가지고 있는 화(禍)일 것입니다.
텔레비전은 “오늘은 비가 오고 있다”라는 장면은 내 보낼 수 있지만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결코 내 보낼 수 없습니다. 바로 추상과 구상의 차이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아직 설명이 불가능한 전달기능을 암시하고 있는 말입니다. 바닷물은 짭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물고기들은 결코 짜지 않습니다. 물과 배는 늘 함께해야합니다. 만일 물이 없는 배는 생각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뱃속에 물이 들어오면 정말 큰일 납니다. 문화인, 종교인 혹은 예술인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이유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모순덩어리입니다.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술을 마시고, 잠 못 잘 일을 걱정하면서도 커피를 홀짝이며, 허파를 더럽힐 줄 알면서도 담배를 피웁니다. 알코올, 카페인, 그리고 니코틴. 이들의 위험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탐닉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삶의 패러독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럴 땐 잠시 옛 생각에 호흡을 멈춰봅시다. 밤늦게까지 눈을 비비며 옷을 다리던 어머니의 못 박힌 손이 그립습니다. 취기 오른 얼굴에 흘러간 유행가 한 자락을 흘리며 내 뺨을 부벼 주시던 아버지의 까칠한 수염의 감촉이 좋았습니다. 급히 먹다 체한 날 밤새껏 '내 손은 약손이다'를 노래하면서 배를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좋았습니다. 영사운드의 '등불'을 자주 틀어 주던 명륜동 술집 '상용이네 집'이 그립습니다. 폴 앵카의 '다이애나', '크레이지 러브'를 곧잘 들려주던 학교 앞 분식센터가 좋았습니다.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와 카펜터즈의 'Yesterday once more'를 들려주던 동아방송의 '밤의 프렛트홈'이 정말 그립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좋아하면서부터 즐겨 들었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가 생각납니다. 오늘은 왠지 모든 추억이 다 그립습니다. 인생이 바로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글/방영숭 패션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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