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정기를 드높인 대(大)한국인 안중근(세례명 토마스)
민족정기를 드높인 대(大)한국인 안중근(세례명 토마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객사한 사람을 고향으로 옮겨다 장사지내는 것)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조국으로 돌아가서 동포에게 각각 나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가 만주 땅 뤼순감옥에서 32세로 순국하기 직전에 정근, 공근 두 동생에게 남긴 말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본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싸운 안중근 의사는 조선 말기 대한제국 시대인 1905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보호하여 준다는 허울 좋은 구실 아래 을사늑약을 강제로 맺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뒤 식민통치의 굴레를 다져갈 때 그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민족의 큰 영웅이다.
독립운동을 펼치던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하고,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원수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고, 일본 법정에서 6차례의 재판을 받은 뒤, 190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당했다.
안중근의 어머니는 재판 시작 7일 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에게 “너는 조선인 모두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니, 항소(抗訴)하지 마라.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라고 격려한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항소하지 않고 담담히 사형을 받아들인 민족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려서 안응칠(安應七)이라는 아명으로 불렸으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관은 순흥(順興), 고려조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26대손이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전 다음과 같은 장부가(丈夫歌)라는 시를 남겼다. 특히 이 시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쥐새끼’라고 지칭하며 강력한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丈夫處世兮,其志大矣。 장부가 세상에 쳐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英雄造時。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
雄視天下兮,何日成業。 천하를 웅시함이여 어니 날에 업을 일울고
東風漸寒兮,壯士義烈。 동풍이 졈드 차미여 쟝사에 의긔가 뜨겁도다
憤慨一去兮,必成目的。 분개히 한 번 가미여 반다시 목젹을 이루리로다
鼠竊伊藤兮,豈肯比命。 쥐도젹 이등이여 엇지 즐겨 목숨을 비길고
豈度至此兮,事勢固然。 엇지 이에 이랄 쥴을 시아려스리요 사셰가 고여하도다
同胞同胞兮,速成大業。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萬歲萬歲兮,大韓獨立。 만셰 만셰여 대한 독립이로다
萬歲萬歲兮,大韓同胞。 만셰 만셰여 대한 동포로다
(장부가의 한글 해석은 당시의 맞춤법에 따른 것)
이제 그가 순국한지 104년이 지났다. 우리나라는 그의 소원대로 경제와 문화,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는 엄청난 발달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나라는 반쪽으로 나뉘어져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군(軍) 폭행사건, 이제는 전직 국회의장의 성추문까지 정치를 비롯한 분야는 여전히 후진국형이다. 특히 아직도 나라 곳곳에 친일파들이 남아있는 현실을 보면서 자신의 생명까지 나라를 위해 희생한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면서 후손으로서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글/ 정영수(명장, 통일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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