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애도(哀悼)의 윤리
<시론>
애도(哀悼)의 윤리
죽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자연사로서의 죽음이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사고로 인한 죽음도 있다. 나쁜 일을 하다가 심판을 받아서 죽게 되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의로운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죽는 죽음도 있다.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반응이 문화를 형성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집 안에 돌아가신 분들의 패를 놓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사는 곳 주변에 고인의 무덤을 집처럼 지어놓고 살아간다. 어떤 곳에서는 환생을 믿어서 죽은 사람을 독수리가 쪼아 먹게 두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죽음은 인간에게 수수께끼 중에 하나였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고 여러 문화에서 갖가지 시도가 있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무상함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기를 추구했고, 기독교 전통에서는 죽음을 저 세상의 세계로 연장하여 죽음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류의 문화는 이와 같은 불사(不死)의 시도 가운데서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했고, 과학자들은 불변의 진리를 추구 했으며, 정령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비록 다른 세상으로 돌아가지만, 자신의 씨앗을 남겨 후손을 생산함으로써 불사를 시도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불후의 예술작품을 남겨서 자신이 사라 진다해도 작품만큼은 계속해서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을 살아생전 그와 맺었던 이야기와 관련하여 기억한다. 주변 지인들의 죽음을 산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그런데 죽음 가운데서도 전혀 새롭게 맞이해야 하는 죽음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억울한 죽음이다. 중국의 사마천이나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의 죽음 등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억울한 죽음으로 기억되어 왔다. 억울한 죽음이기에 살아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욱더 고인을 기억하고자 여러 가지 추모 행사를 기획한다. 죽은 날짜를 기억하고 그 분의 삶을 기억하며 그러한 억울한 죽음이 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순진한 고등학생들이 어른들의 실수로 인해 바다에 빠져 죽은 죽음도 어처구니가 없는 억울한 죽음이다. 구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구하지 않는 죽음이기에 더욱 억울한 죽음이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 앞에서 단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대해서는 안 된다.
9.11 테러 이후에 미국은 이른바 애국자 법을 만들고 ‘이슬람 공포증’을 조장해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여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하였다. 이른바 복수를 통해 애도한 것이다. 또한 희생자들의 기념탑이나 기념 장소를 만들어 거기에 이름을 새기고 기록에 남겨둠으로써 애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애도는 그 자체가 폭력적이어서 새로운 상처를 다른 나라에게 전가시키는 일이며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있는 양심의 가책을 덜어줄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애도의 방식을 통해서는 그러한 사건이 왜 발생했으며, 그 사건이 가져다주는 핵심적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은 자주 망각된다. 미국의 경우 문화적 편견과 적대정책의 소멸이 그러한 사건이 주는 진정한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억울한 죽음의 사건이 망각될까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관용적인 국가, 정의로운 국가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우선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억울한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는 것 곧 망각의 반대말은 기억이 아니라, 정의이다. 억울한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특정한 과거의 사건과 날짜를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억울한 죽음이 있도록 조장한 시스템을 기억한다는 것이고, 이 기억은 더 이상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형이어야 한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재난 방지 시스템을 만들고 더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애도(哀悼)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이러한 애도의 윤리를 망각하며 살아간다. 단지 머릿속에 기억하고 추모함으로써 애도한다고 생각하고, 이와 더불어 내가 져야할 책임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추모를 통해 내 할 노릇은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시 똑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복수도, 희생된 날짜에 대한 기억도, 추모를 위한 행사 및 참여에도 있지 않다. 억울함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정의의 실현에 있다. 글/서기원(본지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사진설명/ 이인수 작 ‘너도 바람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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