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하나님의 뜻'
<시론>
하나님의 뜻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은 전쟁에 나갔다가 패하고 돌아온 친구를 변호하다가 궁형에 처해졌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향을 살면서 ‘사기(史記)’를 저술했다. 그는 이 책의 끝에서 자신이 왜 사기를 저술하게 되었는지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언젠가 후대에 현명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 책을 읽고 후대에서나마 자신을 억울한 심사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역사가의 절절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유대교 전통에도 역사서술이 있다. 누가 어느 시점에서 왜 구약의 이야기들을 저술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기는 하지만,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다윗왕조 시대의 역사가인 신명기 사학파를 거론한다. 신명기 사학파는 다윗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다윗왕조 성립까지의 과거사를 신의 섭리에 입각해 설명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서는 창세기에서 다윗왕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역사적 과정이 모두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설명되고 있다. 철학자 헤겔은 이러한 섭리사관을 철학적으로 해명하여 세계사를 서술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그는 역사란 근본적으로 자유 확대의 역사이며, 나폴레옹의 등장과 더불어 비로소 자유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역사를 서술하는 위의 두 관점은 왜 역사에 관심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확연하게 구별되는 관점을 제시한다. 전자의 관점은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벗기 위해 역사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한 정권이나 사건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수립에 있다. 기독교 전통에서 논의되는 역사서술은 어떤 서술에 가까울까?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새로운 역사를 기록하였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며 새로운 역사를 썼다. 바울에 의해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로의 개종 또한 서구의 역사까지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기독교 전통에서 신앙(pistis)의 관점에서 본 역사 해석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고통이나 실수를 극복하기 위하여 체념적으로 ‘역사’에 맡기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숨어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치유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이나 문제를 주제화 하여 제 3 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에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조상들의 힘든 과거의 고통이 ‘하나님의 뜻’으로 설명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제 3 자의 시선에서 나온 폭력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예수의 입장과는 동떨어진 입장이다. 기독교의 섭리사관을 잘못 적용하면 치유가 아니라 폭력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최근에 세월호 참사를 두고 조류독감에 비유하거나 너무 성급하게 정권투쟁을 위한 거대한 불쏘시개니 국민적 각성을 위한 희생이니 하는 표현들이 자주 나온다. 이것도 희생자들에 대한 아픔에 동참하고 연대하기 보다는 제3자의 시선에서 성급하게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관점에 입각해서 해석하는데서 나온 ‘언어폭력’의 일종이다. 이러한 해석은 섭리사관을 제 3자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나의 희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위해 순교까지도 각오한 사람들의 종교이다. 그들은 자신의 정당성이 비록 현세에서는 인정되지는 못할지라도 내세에서나마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이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사마천의 심정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찾아올 공명정대한 역사적 이성의 눈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공명정대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모든 제도와 법이 타락해서 더 이상 이 세상적인 정의에 기대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외치는 처절한 절규를 반영한다. 이 곳은 ‘하나님의 뜻’을 빌미로 호위호식하며 잘 살아가는 종교지도자들이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평생 나쁜 짓하며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이 임종시에 회개만 하면 가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세상의 정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은 역사적 이성의 눈, 공명정대한 시선을 차안에 기대어 설정한 저 세상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원래 이렇게 절절한 기다림의 표현인 것이다. 글/서기원(논설위원, 의정부 의료원 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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