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청첩장은 세금고지서인가?, 뷔페식권인가?'
생각해 봅시다
청첩장은 세금고지서인가?, 뷔페식권인가?
결혼은 온 동네의 축제요 마을잔치이다. 배고프던 시절 온 동네 거지들이 다 모여 배불리 먹고 거나하게 취하면 노래도 한 곡조 뽑고, 심지어 손주도 손잡고 오면 떡이랑 감주 한 잔 쭉 들이키는 멋과 즐거움을 즐기는 날이다. 신부집 마당이 식장이고 식당이고 놀이판이다. 친척과 이웃들은 형편 따라 술 한 단지, 떡 한 시루, 달걀 몇 꾸러미씩을 부조(扶助)로 들고 왔다. 신부댁은 갖가지 빛깔의 색떡을 대청에 죽 늘어놓아 화환처럼 장식했다. 누구라도 결혼을 축하할 수 있었고 누구라도 흥에 겨워 먹고 마시고 놀다 갔다. 1950년대 전문 예식장이 등장하면서 왁자지껄한 마을잔치는 서서히 사라졌다.
6·25 한국전쟁 후 서울에서 처음 생긴 결혼식장이 관훈동 종로예식장이었다. 공회당처럼 밋밋한 실내에 의자만 줄지어 들였지만 면사포 쓰고 신식 결혼식을 올릴 수 있어서 인기를 끌었다. 그 뒤로 세월이 가면서 결혼식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아졌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자란 시인 정일근은 둘째·셋째 고모가 시집가던 날을 제일 신났던 잔칫날로 기억한다. 그는 "결혼식이 축제였던 시절은 끝난 지 오래다. 청첩장이 세금 고지서 같고 뷔페 식권 같다"고 했다.
며칠 전 어느 결혼식 이야기에선 '축제'라는 결혼의 의미가 새롭게 빛났다. 한국 신랑과 일본 신부는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결혼식을 치르는 게 싫어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맑은샘 펜션을 빌렸다. 그곳 텃밭 채소로 차린 식사까지 합쳐 식장 값이 430만원이었다. 청첩장은 신랑·신부가 그렸고 부케는 신부와 친구들이 만들었다. 가족과 친지 130명이 모여 웃고 떠드느라 낮 두 시에 시작한 예식과 피로연이 새벽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도시에서 예식장 말고 혼례 올릴 곳이 어디 있느냐고 하겠지만 찾기 나름이다. 교회·성당·구청이 있고,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강당이나 운동장도 훌륭한 대안이다. 한적한 야외에는 좋은 곳이 더 많다. 신랑·신부와 양가 부모가 마음을 합쳐 체면과 겉치레만 벗어던지면 된다. 청첩장을 '살포'할 필요도 없고 하객을 양껏 불러 모을 일도 없다. 양주시 효촌저수지는 자연환경이 환상적이다. 그런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더 큰 축제가 될 것이다.
한 달 전 택시를 탔는데 택시기사가 '축화혼(祝華婚)'이라 쓰인 봉투를 꺼내 흔들어 보인다. "이게 웬수(원수)입니다. 7년 전 받아먹은 것을 오늘 갚으러 갑니다." 그는 아들 결혼식 때 축의금을 보냈던 다른 택시기사의 딸 혼례에 간다고 했다. "왜 웬수입니까"라고 묻자 "절대 잊지 않고 있다가 갚으라고 뒤쫓아 오니까 웬수죠" 했다. 힘 있는 '갑(甲)'의 인사가 경조사를 당하면 손님이 북적인다. 돈 봉투 들고 찾아가는 '을(乙)' 사람들은 언젠가 돌려받게 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뜯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준(準)뇌물이요, 준상납금이라고 투덜대며 봉투를 만드는 일도 흔하다. 고위 공직자가 주위에 알리지 않고 자식 혼례를 치렀다는 뉴스를 위선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농민들은 땅을 담보로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경조사비로 충당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결혼 시즌인 봄·가을에 퇴직자들의 비명소리가 더 크다. 첫째 아이 결혼 때 축의금을 받았는데 둘째가 미혼이라면, 그는 어디든 봉투를 들고 찾아가야 할 처지다. 은퇴자들의 연간 경조사비 총액은 116만원이다. 이들은 '얼굴(체면)이 안 깎이려고(46%)' 또는 '과거에 받았던 금액 때문에(42%)' 무리를 한다. 자신의 생활수준에 맞춰 액수를 정하는 사람은 2%뿐이다. '가족·친척 중심으로 간소화하자'거나 '아예 주지도 받지도 말자'는 경조문화 개선 의지는 강하지만, 현실은 꿈쩍도 안 한다.
축의금·부의금은 사람 사는 세상의 낙이지만 결혼식을 사치로 생각한다면 잘못 된 것이다. 불경기 때 일수록 열에 여덟이 '서로 괴롭히는 짓'이라며 고통을 호소한다. 그 고통에서 해방되려고 어떤 직장인들은 각자 2만원씩 모아 여러 사람 이름으로 10만원을 내기도 한다. 축의금이 은퇴 후 빠듯한 생활비를 축내는 판이다. 우리나라 애경사의 인심은 안 할 수도 없다. 만약 안했다가 우연히 만나면 죄 지은 것 같다. 체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외국에서의 결혼문화를 수입해서 사용해보면 어떨까...
글/박태원(본지논설위원, 양주사랑포럼회장, 예원예술대학(양주캠퍼스)발전위원회장, 초성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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