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원의 '정체성과 폭력'
정체성과 폭력
사무엘 헌팅턴은 그의 “문명충돌”이라는 책에서 21세기의 갈등상황은 더 이상 인접국가간의 국지전의 전쟁이 아니라, 문화 혹은 문명 간의 갈등 곧 이슬람과 기독교 등이 대립양상을 보이는 비대칭적 전쟁의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예언이 적중이라도 하듯이, 미국과 이슬람 세계간의 갈등양상이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근본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이분법적인 구도가 늘 그렇듯이, 특정의 대립적인 사안에만 주목한 나머지, 동질성과 다양성을 간과한다. 이슬람 세계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서구 기독교적 가치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 다수 존재하고, 기독교 세계라고 하더라도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갖지 않는 다수의 정체성들의 존재하고 있는데, 이분법적 구도에서는 이 다수의 정체성이 간과된다.
최근에 한국에서 일어난 종북(從北)이라는 범주도 헌팅턴이 범하고 있는 지나친 이분법의 도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가 있다. 또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헌법에 보장된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다. 만약 어떤 사람들이 정부정책에 반대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종북 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의견의 다수성과 정체성의 다양성이 사라져 버리고 극단적인 대립양상만이 남게 된다. 이것은 범주적 이원화를 넘어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러한 극단적 이원화를 통해서 빗어진 근 현대사의 갈등 한 복판에 서 있다. 냉전이 끝나고 전 세계가 서로의 이념이 가진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이 시대에 한국만이 낡은 정체성의 범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직도 65년 전의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은 남과 북은 물론 남한 사회 자체를 갈라놓고 있다. 이영희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날아갈 수 있는 법인데, 한 쪽 날개가 없어야 잘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한국사회가 이 이분법적 악순환의 고리를 넘어 어떻게 앞으로 나가갈 수 있을까? 대립극의 한 측면을 포용하고 수용해야 한다.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인 지적했듯이, 대립의 양극을 통합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싫어하는 내면의 그림자를 무의식에 간직하고 있다. 이 그림자가 외화 되는 방식이 곧 투사인데, 투사 심리기제는 타인을 대상으로 하여 폭력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내 안에 있는 상처와 응어리를 타인에게 전가한 다음, 폭력으로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여러 차례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한 마을에서 ‘완장’을 차게 된 사람들의 행위는 바로 이러한 투사의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지주에게 서러움을 당한 사람은 북한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에는 자신이 당한 설움을 복수하고자 한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 지루하고도 소모적인 싸움이 ‘완장’(권력)과 결탁되어 지속되고 있다. 권력의 장악 여부에 따라 누군가는 희생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개선장군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적(敵)이라고 간주되는 상대방을 포용해야 한다. 대화와 소통을 통해 자신을 넘어 상대방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먼저 가서 화해의 악수를 청해야 한다.
악수란 원래 적대적일 수 있는 사람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사람들의 지혜이다. 사람들이 악수하는 이유는 당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한다. 내가 상대방에게 적(敵)이 아님을 먼저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진정으로 힘이 있고 강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위이다. 약자는 약자이기 때문에 상대방에 대한 피해의식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 먼저 가서 화해하고 용서하는 지혜를 발휘할 때, 얼었던 눈이 태양아래 녹듯이 그렇게 따뜻한 나라가 성큼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대립을 포용하지 못할 때, 나의 정체성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한 번 받아들여 보자. 그러면 나도 상대방도 바뀔 것이다. 글/서기원(본지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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