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의 '세상을 밝히는 죽음'
생각해 봅시다
세상을 밝히는 죽음
평생 남을 위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1급 장애인 고(故)장영희 교수는 어느 날 백화점에 갔는데 사람이 너무 혼잡해 목발이 누군가를 건들까봐 조심스레 살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옆에 있던 너댓살 난 어린 아이가 떼를 쓰며 울고 있었는데 아이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장 교수를 가리키며 “저 봐, 에비 에비 계속 울면 저 사람이 너 잡아간다.”고 말하자 아이는 무서워 벌벌 떨며 울음을 그치더란다.
아이 엄마는 장애인을 ‘공포’ 또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을 심어 주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장애인을 보면 자연스럽게 ‘나쁜 사람, 남을 해코지 할 사람’으로 연상할 것이다. 전쟁을 하면 전쟁터에서 싸운 군인들이 적이 쏜 총에 죽던가 아니면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몇 년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전쟁터에서 눈에 총알이 박혀 애꾸가 되었지만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많이 했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는 닉 부이치치의 힐링 강연에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다. 희망을 잃는 사람과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예비 장애인이다. 누구든지 장애인이 될 수 있다. 그 사람의 외면을 보지 말고 내면을 보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며 살아가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몇 년 전 췌장암으로 별세한 스티브잡스의 죽음 앞에 그를 애도하는 모습을 보며 분열된 세계가 모처럼 일치된 현상을 보였다. 잡스의 죽음에 대한 세계의 반응을 보면서, 우리 역사에서 그 죽음을 온 국민이 슬퍼한 사례가 떠올랐다.
조선시대의 무신(武臣)으로는 이순신장군의 죽음이 가장 큰 애도를 받았다. 문신(文臣)중에서는 율곡 이이의 경우가 그에 필적한다. 두 분 모두 덕수 이씨에 선조 때의 인물로 전쟁의 와중에서 별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순신장군은 일본이 일으킨 전쟁인 임진왜란이 종결되는 시점에서 전사했고, 그의 전사 사실을 안 백성들이 자기 부모가 별세한 듯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한다. 율곡은 북쪽의 여진족이 쳐들어온 전쟁인 니탕개란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에 병사했다. 율곡은 매우 뛰어난 학자이자 문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두뇌와 문장력으로 과거시험 볼 때 마다 석권하여 아홉 번 장원의 영예를 안았다. 벼슬길에 오른 뒤 투철한 안목과 철저한 현실감각, 뛰어난 행정력으로 능수능란하게 국정을 잘 다루었다. 선조 15년(1582년) 12월에 병조판서로 임명받은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있다가 선조16년 1월 하순 니탕개란이 발발하자 임금님의 명을 받아 취임하여 전쟁진압을 총지휘했다.
율곡은 수십 년만의 외침(外侵)으로 전쟁이 일어난 비상시기라 처리할 사무가 많았지만 지혜롭게 사무를 잘 처결했다고 한다. 전시비상대책인 ‘공안(貢案)을 고치고, 액외병(정원 외 병사)을 두고, 곡식을 바친 자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참전한 자에게 서열을 무시하고 특전을 주는’ 등 개혁정책을 이끌었다. 그러나 정치적 반대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거센 탄핵과 비난을 당한 끝에 그해 6월에 병조판서 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넉 달 후 다시 나라가 위태롭게 되자 임금님의 명을 받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여 만인 선조 17년 1월 7일 향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전시의 격무와 잔혹한 탄핵으로 인한 막중한 스트레스가 그의 운명을 달리하게 했다. 그의 죽음은 온 나라에 큰 충격과 슬픔을 주었다. 그를 격렬하게 탄핵하고 비난했던 반대자들의 지도자였던 우성전(禹性傳)이 쓴 ‘계갑일록’에는 당시의 모습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임금님이 부고를 듣고 애통하여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궁벽한 촌민들도 모두 머리를 모아서 곡하고 슬피 울부짖으며 서로 조상(弔喪)했다. 태학생(太學生), 금군(禁軍), 시민, 하급관리, 각 관청의 아전들이 모두 와서 울며 제전(祭奠)을 드렸다. 발인하는 날 횃불을 들고 영구를 보내는 사람이 수십 리에 뻗쳐서 거리를 메웠고, 동네마다 슬피 우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성균관에 기수하는 유생들이 성균관으로부터 향과 제찬(祭粲)을 메고 백색 단령을 입고 좌우로 줄을 나누어 걸어가며 길 가는 사람을 벽제(辟除)하니 상소할 때와 같았다”고 고백한다.
강력한 탄핵과 비난이 닥칠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국가의 존립을 위하여 과감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던 율곡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를 기리고 그로 인한 죽음을 온 백성이 슬퍼한 것이다. 니탕개란이 일어난 지 9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니탕개란 때 경험했던 율곡의 개혁정책들은 임진왜란에 대처하는 기본정책들이 되어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그로보아 율곡이 별세했을 때 그처럼 슬퍼했던 민중의 역사 보는 눈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생애를 높이 기리고 그 죽음을 크게 슬퍼할 위인을 갖는다는 것은 실로 큰 축복이고 국민으로서는 큰 행운이다.
그런 위인들로 인하여 역사가 발전하고 민중의 생활이 향상된다. 우리 사회가 그런 위인들을 어떻게 찾아내서 길러내며, 어떻게 그들의 위인 됨이 제대로 발현되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다.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온 세상이 자기 것 인양 땅땅거리며 권력을 누리며 살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볼 때 한없이 불쌍함을 느낀다. 인간으로 이 세상에 기적적으로 태어났으면 순국자가 되어 후세로부터 존경받는 자가 위인인 것이다. 글/ 박태원(본지논설위원, 양주사랑포럼 회장, 서정대학교 겸임교수, 초성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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