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와 1%
우리는 늘 숫자와 더불어 생활한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것들이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주민번호, 자동차 뒷 번호, 전화번호, 집 주소, 화폐 등등 모든 것이 숫자로 위치 지워진다. 특히 우리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경제적인 단위는 모두 숫자로 이루어진다. 수의 비례와 비율에 따라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달라진다.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기분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 모두가 숫자놀음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고대서부터 숫자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세상은 수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고,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다빈치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황금비율에 관심을 보여 인체나 나무 잎사귀 등의 황금비율을 그림으로 재현하고자 하였다.
건축을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들 거의 모두가 1개 이상씩 가지고 있는 은행카드나 교통카드 등도 황금비율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이 황금비율이 사람들에게 안정감은 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숫자의 비율에 따라 안정감을 느끼는 정도가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태리의 파레토가 발견했다고 하여 파레토 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법칙은 2대8의 법칙이다. 은행 수입의 80%는 예금자의 20%가 담당하고 있으며, 출판사에서 출판한 책 가운데 20%가 출판사 이익의 80%를 차지하고, 대기업 직원의 20%가 80%의 직원을 먹여 살린다는 법칙이다. 소수가 나머지 다수의 이익을 결정짓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안정적인 경제운영의 토대가 된다. 왜 이런 법칙이 성립하는 것일까? 이러한 법칙과는 달리 새로운 ‘법칙’이 최근에 나왔다. 미국의 월가에서 시작된 시위도 1%의 은행지주가 세계은행을 지배하며 전 세계 99%의 서민의 경제활동을 좌지우지한다고 한다고 본 데서 출발했다.
최근에 쟁점이 되고 있는 한미 FTA비준 문제도 결국은 이 퍼센트의 문제이다. 잘 나가는 기업의 부가가치와 농수산물 등이 손익 분기점에 관한 계산법에 이견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합의가 도출되기 어려운 것이다. 무역을 하면 무역하는 국가 모두에게 전체적으로는 이익이지만, 무역을 통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두 동일한 기준과 완벽한 평등의 조건 하에서 협상이 이루어지 지지 않기 때문이다. 협상이란 결국 손해를 최소화 하려는 과정에서 나오는 셈법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강행하는 이유 안에는 여전히 파레토의 법칙이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담 스미스 이후 모든 경제법칙은 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움직여진다고 간주되곤 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잘 나가는 1%의 손이다. 주식시장에서 흔히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개미 투자자’들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1% 정도의 큰 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수요와 공급 그리고 경쟁의 메카니즘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조절되어 가는 시장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독점자본주의 금용자본주의로 변화되어 가면서 이 법칙이 그야말로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법칙이 되어간 것이다.
오늘날 많은 나라들이 이 금용자본주의 1%의 손아귀 안에 있다. 한국의 IMF위기나 그리스 금융위기 모두 이 1%의 힘에 무너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국민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필품을 생산하는 생산 담당자는 노동자, 상인, 농민들이다. 이들이 실제로 경제활동의 주체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의 노예와 마찬가지로 1%의 귀족을 위해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번 선거철이 되면 1%에 속한 사람들이 99%대다수가 사는 시장에 나들이 나온다. 그리고 한번도 해 본적이 없는 힘든 일을 하느라고 애쓴다. 먹어 본적도 없는 것을 먹어 보느라고 애쓴다. 그러면서 자신이 1%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99%의 다수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권력을 구걸 한다. “보통 사람”, “서민”이란 단어들이 많이 나오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낮은 곳으로 향한다.
서민들과 관계없는 1%의 인구들만 사는 고독한 섬에 살면서 자신이 서민들과 함께 사는 체한다. 선거철만 되면 그들은 사실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노예처럼 넙죽 절한다. 문제는 99%의 사람들이 이 1%의 수법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보면서도 스스로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자신이 바로 보아야 할 지도자를 똑 바로 보지 못하고, 엉뚱한 속임수에 넘어간다. 이제 곧 총선과 대선이 다가온다. 이번에는 주인인 99%가 누구인지 바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1%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소외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99%에 의한 안정된 삶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생각배봅시다
서 기 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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