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저절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관점에서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가급적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고 무역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부를 창출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의 저서『국부론』의 관점에서만 보면 이러한 입장이 그다지 틀린 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국부론』을 쓰기 17년 전에『도덕 감정론』을 썼는데, 그의 이 책과 연관해서 보면 아담 스미스의 경제이론에 대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원래 그의 관심사는 어떻게 한 사회가 질서 잡힌 사회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한 국가의 번영은 이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수단에 불과했던 이 부분을 그의 이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전체적으로 국민소득이 높아지면 국가의 부가 저절로 균형 있게 발전할 것이라는 관점으로 이해되어,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무역과 무한경쟁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아담 스미스의 입장은 이러한 입장과는 거리가 있다.『도덕 감정론』에서 아담 스미스는 동감(Sympathy)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누구나 다 다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에 동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동감의 능력을 얻게 되며, 이를 통해 서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경향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서 우리는 당연하게 나와 남을 공평한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을 형성하게 된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공정한 관찰자’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화를 내게 되기도 한다. 아담 스미스는 우리가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 서서 만족을 하게 되면 화를 내는 일도 없게 되고, 스스로 편안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서 지혜로운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만약 욕심과 명예에 가득차서 자신의 이익을 더 얻고 더 많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허영심’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약한 사람이 된다고 보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타인과의 이해관계 속에서도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된다면 서로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취하는 공정한 거래가 이루어진다. 아담 스미스는 이것을 나와 남을 똑같이 생각하고 대우할 수 있는 정의감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될 때에는 나와 남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정의감 없이 다른 사람과 교역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균형이 깨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치와 허영심에 가득차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연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나라들의 부와 번영이 창출된다고 아담 스미스는 보았다. 이들에 의해 부(富)는 창출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담 스미스에 따르면 이들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도덕 감정론』3부 3장에서 아담 스미스는 에피루스 국왕의 예를 들어 말하고 있다. 하루는 에피루스 왕이 신하에게 이웃 나라의 최후 정복에 관한 계획들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하는 왕에게 그 계획이 다 실현되고 나면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이 때 왕은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친구들과 더불어 즐겁게 지낼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친구들과 사귀도록 노력할 것이다....” 신하가 대답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지금 폐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에피루스 왕처럼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지금 주변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행복한 순간들을 외면하고 살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 경제학의 토대는 부자들의 정의감에 따라 이루어지는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학이라 할 수 있다. 즉 이익만을 추구하는 탐욕의 경제학이 아니라, 도덕적인 삶의 실현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경제학인 것이다.
당시 미국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영국에『국부론』을 통해 충고한 것처럼, 만약 오늘날 아담 스미스가 살아 돌아와서 미국 정부에 충고한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정한 관찰자’의 태도에 서서 자유무역을 하라~”라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미국과의 FTA체결에서 ISD 조항은 아담 스미스가 좋아하지 않을 조항이라고 생각된다.
무역 분쟁이 생기면 미국은 자국법을 우선시하고, 한국은 FTA법을 우선시 한다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다. 즉 ‘공평한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면 정의감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결국 미국은 언제나 보호무역을 할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고, 한국은 언제나 자국의 이익과 관계없이 자유 무역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왜 한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초과이익공유제’에서와 같은 정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과의 관계에서는 정의감을 바탕으로 한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견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Win-Win 의 세상을 만들어 서로 부자가 되려면 반드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논리에 입각한 정의감이라고 하는 도덕의 길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지금의 한미-FTA의 문제에 대한 아담 스미스의 해법이 아닐까 한다. 한국 정부와 국회는 시간에 쫓겨 구한 말 열강과 맺은 과거의 불평등 조약을 다시 답습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자의 길, 도덕의 길
서기원/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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