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런 썰렁한 스토리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회사에서 상사가 시키는 일마다 매번 거절을 하는 직원의 답변이다.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은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자유의지의 표현인가. 그렇다면 윗사람에게 밸이 꼴려서 억하심정이 충만하다는 뜻인데, 이 직원이 어떤 그룹 총수의 아들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이 무슨 경영수업을 받겠다고 낙하산을 타고 나타난 해외 유학파 인물도 아니고 참,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지만 어디 밥 벌어먹는 직장에서 윗분의 지시를 따박따박 말아 잡수신단 말인가. 오죽하면 동료사원까지 미친 거 아니냐며 혀를 내두를까. ‘안 하는 편을 택하겠다.(I prefer not to)' 이건 완벽한 거절에 대한 완곡한 어법이다.
단 칼에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 비교법식으로 슬쩍 눙치는 거다. ‘하는 것’과 ‘안 하는 것’ 사이에 폭넓은 완충의 스펙트럼이 있어서 안 하는 쪽을 택해도 정당한 것 같은 뉘앙스가 담겨있다. 하여튼 상사의 지시마다 이런 ‘얌체’ 같은 멘트를 날리며 뺀질거리는 사원 바틀비는 지금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젊은이 상을 연상케 하지만 이미 19세기에 생성된 인물이다. 그렇다고 바틀비가 하루 종일 직장에서 놀고만 먹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본연의 임무인 문서 베끼기는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그 외의 일은 절대 안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밝히는 것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는 이처럼 이상한 존재감을 나타내는 사원 바틀비의 이야기다. 필경사라는 직종은 지금처럼 컴퓨터 워드로 문서작성을 하지 않던 시대에 손으로 일일이 글씨를 베껴 쓰는 아주 섬세한 수공업 노동의 일종이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묵묵히 기계적인 필경사로 일하면서 동료직원들과도 거의 소통을 안 하는 바틀비는 무채색의 이미지를 띄고 있다.
그는 사무실에 아주 눌러 붙어서 숙식을 해결하는 주제에 변호사인 주인상사에게 잘 보일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아가 강한, 요즘 세대 말로 좀비 비슷한 인물이다. 이 소설 속에서 이상한 것은 그런 막 되먹은 직원을 당장 해고시키지 않는 상사의 포용력이다. 혹시 그 변호사는 비리를 일삼는 나쁜 인간인가.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없으니까. 살벌한 시장경제 구조 논리상으로 회사에 별반 득 될 것도 없고 고분고분하지도 않는 사원을 계속 데리고 쓴다는 것은 업주의 관용이 아니라,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태도에 최소한의 불안, 분노, 성급함, 무례함이 있었다면”, 즉 바틀비가 정상적인 인간이었다면 차라리 내쫒았을 것이라는 변호사, 그는 악덕 기업주가 아닌 게 분명하다. 하지만 종업원에게 ‘하지 않을 자유’는 그리 오래 허락되지 않는 법. 자선사업가도 아닌 변호사는 마침내 뺀질이 바틀비를 떼어버릴 계책으로 사무실을 옮겨버린다.
문제는 바틀비가 예전의 그 사무실에서 떠나지 않고 여전히 점령하고 있다는 것. 새로 입주한 주인이 아무리 나가라고 등 떠밀어도 유령처럼 들러붙어있던 바틀비의 최후는 결국 감옥행이었다. 그는 교도소 안에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밥도 안 먹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다가 죽어버린다.
아, 뭐 이런 썰렁한 스토리가 다 있어? 이 사건의 배경은 미국의 월스트리트 거리, 현재는 세계경제의 심장부인 증권가. 숨 막히는 사무실에 틀어박혀 자신의 혈기왕성함을 짓누르고 나날이 창백해져가는 현대의 바틀비들. 왜 지금의 젊은이들은 점령하라(Occupy)!를 외치며 대오의 물결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결코 19세기의 바틀비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는 말만 연발하며 좀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거. 혹시 직상에서 윗사람의 입장인 독자분들, 어느 날 갑자기 아랫사람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반항의 조짐이 나타났을 때 당황하지 마시길. 저게 아주 매를 벌고 있네, 너 아니라도 일할 사람 널렸거든!
울컥 열 받아 봤자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우리들의 자화상인 것을. 무기력하리만치 유순하고 복종적이었던 젊은이가 불쑥 오큐파이(Occupy)!를 외치며 돌변할 때 그 분노를 막을 길이 없다. 감옥에 갇혀서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간 바틀비에게 역시 감옥에서 변호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청년 뫼르소(카뮈,『이방인』주인공)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가치관이나 질서, 통념을 비웃는 게 아닐까? 늘 예스맨, 긍정맨으로 살기를 훈련받은 사람들, 그들은 결코 도인이 아니다.
황영경교수의... 문화 오딧세이 ‘책이 있는 풍경’
글/황영경 교수(신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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