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맥아더장군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장군이다. 2차 대전의 전쟁경험을 살려 6.25전쟁 초기부터 서해안 상륙을 염두에 두었다. 인천은 서울에서 인접해 있어 북한군 중심을 흔들 수 있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발달해 비어수로(飛魚水路)가 좁아 접근하기 어려운 점을 역이용했다.
드디어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인천 월미도에 상륙하여 천지를 흔드는 포성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미 해병사단과 육군7사단, 국군해병4개 대대병력은 함포사격 2시간 만에 인천을 되찾았고 이튿날 김포지역 작전과 함께 허술하게 방어하고 있던 2,000여명의 북한군을 격퇴시키고 이 지역주민들이 해방되었다.
이 작전에 이어 서울 탈환작전이 이어져 9월 28일에 서울이 수복되었고 중앙청에 태극기가 걸리고 북한군 병참로가 끊기면서 6.25전세는 역전이 되어 낙동강전투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戰史)에 최고 상륙작전으로 기록됐다.
상륙작전 지휘함에는 70세의 노병(老兵)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서있었다. 유엔군사령관 자격으로 압록강까지 올라가 만주를 폭격시켜 통일 대한민국을 만들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해리트루먼 대통령과 의견충돌로 결국 이듬해 4월 해임되고 말았다.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행한 고별연설은 지금 곱씹어보아도 감동적이다. 한국어 번역문이 무려 1만 자에 이른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 질 뿐이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생도 시절 불렀던 군가의 후렴을 인용하면서 52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했다. 인천 자유공원에 우뚝 선 맥아더장군 동상은 오늘도 월미도 앞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상륙작전 61주년을 앞둔 13일 우리해병 참전용사 5명이 이곳을 찾아 맥아더 동상과 ‘자유수호의 탑’에 거수경례를 올리며 숭고한 정신에 고개를 숙였다.
백발이 성성한 70대 노병들의 눈매는 꽃다운 20대 그대로였다. 기념일인 15일에는 재향군인회 초청으로 한국에 온 미 해병 참전용사 200여 명이 이곳을 찾는다.
맥아더의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통일됐을 것이라는 반미(反美)단체들의 논리는 이 땅에 공산화됐어야한다는 논리다. 헨리아이드 미 한국국제관계위원장이 “철거하려면 미국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는 지난달 휠체어를 타고 맥아더동상을 직접 찾았다.
“새 친구가 은(銀)이라면 옛 친구는 금(金)이다. 맥아더장군의 업적은 순금이다”는 그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맥아더 덕분에 공산화를 막고 번영을 이룬 처지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지금 북한을 보라. 자유도 없고 먹을 양식도 없다.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이면서 권력세습을 3대까지 이어가고 있다. 맥아더장군 말처럼 만주에다 원자폭탄을 터뜨렸다면 우리는 통일이 되었고 옛 우리의 땅 만주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국민 모두 맥아더 장군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자.
박태원-인천상륙작전
박태원(논설위원, 호원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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