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봅시다.
용서(容恕)와 화해의 사회를 향하여
신약성서에 보면 예수는 베드로의 용서에 관한 질문에 무조건 용서하라고 한다. 살다보면 용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3번까지는 용서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과연 용서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용서해야 될까? 만약 용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용서의 반대말을 생각해 보자. 그럼 복수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 만약 복수하면 어떻게 될까? 복수를 하면 내 마음은 시원하겠지만, 복수를 당한 사람은 또다시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되면 복수의 악순환에 빠져 버리게 될 것이다.
신문에 나오는 많은 기사들을 읽노라면, 표면적인 사태를 넘어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들이 많이 있음을 느낀다. 최근의 예를 들면 황산테러나 서강대 교수 징계사건이나 야당과 청와대의 갈등 등은 모두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끝은 결국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 시작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될 것이다.
상대방이 잘못했기에 당연히 그 사람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대방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복수를 생각했는데, 상대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복수의 악순환 고리가 생기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위에서 말한 복수의 정의감을 시정적(是正的) 정의(正義)라고 불렀다. 내가 5개 손해를 보았으면, 상대방도 이 만큼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한 정의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감은 판사가 가지고 있어야할 정의감이지, 개개인이 가지고 있어야할 정의감은 아니다. 그렇다면 개인의 가져야할 정의감은 무엇인가? 고소 등을 하여 재판에 이르기 전에 근원적 공정성에 의한 정의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근원적 공정성이란 나에게나 남에게나 똑같이 대우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나를 살펴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분쟁조정의 역할을 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다가오는 단어가 바로 용서이다. 사람들 사이의 모든 복잡한 실타래는 용서를 실천하지 못한데서 온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게 가장 필요한 것은 역지사지의 논리에 입각한 용서이다. 물론 용서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계산하려는 우리의 합리적 이기심이 쉽게 용서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해 갈 수 있을까? 예수는 무조건 용서하라고 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이 말의 의미가 다가지오지 않는다. 혹시 신앙인의 입장에 들어가면 좀 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도 있겠지만 용서는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의 기준점을 생각해 보자. 우선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했는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했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할 수밖에 없었다면 우리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알면서 했는가? 아니면 무지로 한 행동인가도 물어보아야 한다. 판단 능력이 부족한 미성년자나 교육수준이 낮아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사람에게 가혹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배워서 그 중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교육을 받은 사람과 똑같은 책임을 부과한다면 근본적으로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요나 무지로 인한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그러워져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닐 경우 즉 지성인이 용서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고 해도 보다 근원적인 교육의 문제에 입각해서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즉 머리로만 옳고 그름을 이해하고,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없는 지식만을 전수 해온 교육의 차원에서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시비(是非)를 공정하게 가를 수 있는 훌륭한 법(法) 이전에 개개인의 인성교육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용서하는 법을 가르치고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서기원/ 논설위원, 의정부의료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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