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이열 시인 전상서’
스승의 날에 부치는 ‘이열 시인 전상서’
이열(李烈)시인(사진)은 본명이 이인열로서 1934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태어나 월남하여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하고, 1959년 시 <고요하다>가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내게 원고지 쓰는 법부터 가르쳐준 문학 스승이다. 내가 경남 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서라벌고로 진학했을 때 그는 국어와 문학특활반 지도교사였다.
최송림의 이야기 정거장 ‘이열 시인 전상서’
그는 시든 산문이든 문학작품은 설명이 아니라 묘사라며 ‘시의 이미지’에 대한 수업을 열정적으로 강의하다가 기어이 터뜨리던 기침소리가 지금도 가슴을 울리며 아리게 한다. 그는 폐결핵환자의 몸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교단을 생명처럼 지켜냈던 것이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이선생의 결핵균이 학생들에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의사 소견이 있어서 그나마 교사생활이 가능하지 않았나 짐작된다.
하지만 그는 병이 점점 깊어져 교사직을 그만 두고 집에서 투병생활에 전념할 때다. 내가 봄날 저녁에 송천동 집으로 병문안을 갔었다. 선생님의 노모께서 병수발을 하고 계셨다. 마침 창가에 목련꽃이 활짝 피었는데, 목련화를 어머니와 비유해 쓴 그의 시 한 구절이 먼저 생각난다. “목련이 피면 나는 앓는다, 어진 꽃이여!” 그의 병은 봄이 되면 유난히 더 심했던 탓이다. 그의 아픔으로 목련이 피는지, 목련이 피어 그가 아픈지… 그만큼 어머니의 간호도 더 지극 애틋했다.
병상에 누워 움직이기조차 힘든 아들은 그런 목련 같은 어머니에게 거울을 내밀며 목련꽃너머 달이 보고 싶다고 했다. 마치 어린애가 젖 달라고 칭얼대는 것 같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어머니는 거울 속에 하늘의 달을 담아 병든 노총각 시인 아들에게 비쳐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문학청소년 아니랄까봐 <거울 속의 달>이라는 제목부터 지어놓고 작품을 하나 쓰리라 다짐했다. 물론 나는 여태껏 나 자신과의 그 약속을 못 지키는 못난이 제자다.
그토록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을 어찌 내가 ‘설명’ 아닌 ‘묘사’로 ‘이미지’ 손상 없이 잘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래도 언젠가는 그 제목으로 멋진 희곡 한편을 써내리라는 질긴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산다. 글쎄, 미완성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그야 어쨌든 어머니를 하늘나라에 먼저 보내신 후 이열 시인도 1986년 11월 27일 51세를 일기로 세상을 버린다. 병마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그가 남긴 주요작품은 대표 연작시집 <돌의 연가(戀歌)>를 비롯해서 <얼굴의 노래><창가에 서라><자서초(自敍抄)><하가> 등등이다. <하가>는 ‘鶴아!’의 연철이다. 이열 서간집 출판기념회 때는 축하객으로 성황을 이뤘던 추억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로 떠오른다. 축사를 하는 고 함석헌 옹과 현재도 건강하여 노익장을 뽐내는 김동길 박사의 모습이 새롭다.
내 딴엔 명색이 전쟁둥이 극작가로서 모노드라마와 통일연극 시리즈를 꾸준히 발표해온 셈인데, 지금 와서 곰곰 생각해보면 그분의 영향이 크지 않나 싶다. 연극무대의 1인극 배우처럼 이 광활한 지구촌에서 혼자 버텨낸 이시인의 일생과 그의 시 <고요하다>는 나에게 문학적으로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음이 확실하다.
그가 전쟁 전후에 월남할 당시 나는 태어났고, 희곡부문으로 장르는 다르지만 나도 경향신문신춘문예 출신이다. 이 시인이 돌아가신 후 그의 제자들로 뭉친 연극을 대학로 문예회관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사람을 보라는 뜻의 <에케호모(ECCE HOMO)> 역시 내 통일연극 시리지 중 한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에서 희곡의 모티브가 된 <고요하다>의 출처를 자랑스럽게 밝히고 극중 클라이맥스에 발췌하는 걸로 마무리 손질했다. 제작자인 극단 창조극장의 김정택 대표를 비롯해 김동중 연출, 연기자로는 문창길 배우와 재작년 세상을 떠난 임홍식 배우 외에도 정완식 분장에 조창희 사진 스태프까지 이선생의 고교제자들로 참여했다.
그 연극에서 <고요하다>를 발췌 낭송한 그대로 옮겨본다. “포탄에 벗겨진 나무에 병사가 칼끝으로 낙서를 하였다./ <고요하다>/ 태초부터 쌓이고 쌓인/ 산울림/ 산벼랑을 가로질러/ 가파르게 찢겨나간/ 여기 해발 천오백미터 고지/ 초연이 스쳐간 골마다/ 값싼 보람이 풀잎을 흔든다./ 저 녹 슬은 철모는/ 향수를 문지른 피비린 자국인가./ 사람은 사람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마주 선 언덕과 기슭과/ 들 끝과 강가에서/ 외로운 조국은 방황하였다./ 여기는 중동부/ 옛적 비바람과 번갯불에 패인 계곡./ 잎이 다시 피지 않는 고목의,/ 연륜이 멍이 진 피부에/ 서투른 한글의 상채기./ 떠나가선 영 오지 않는/ 병사의 비명./ 고지와 고지로 에워싸인/ 창세기의 놀이 비낀/ 삽화가 눈부시게 퍼져 온다.”
이것으로서 스승의 날에 부치는 못난 제자의 못 다한 이야기 편지가 될 수 있을지 부끄럽다. 이 글을 직접 들고 그의 육신이 묻힌 양주골 풀무원에 달려가 묘비에 엎드려 ‘이열 시인 전상서’로 바쳐야겠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이열 시인이 하늘나라에서 달과 별을 벗하며 내려다보고 빙그레 웃으실 지도 모를 일이다. 글/ 최송림(본지 논설위원,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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